내 주변에는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상한 건 모태 신앙인 사람들 대부분이 신앙인이라기보다는 그냥 종교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관심사나 대화의 주된 깊이나 내용은 신앙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너무 많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들은 보이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려면 그것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시간보다는 현실의 것들에 더 많은 의미와 가치를 둔다. 그건 아마도 현실적인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함일 것이다. 걔 중에는 신앙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건 기만이다. 기만의 목적은 상대가 모르게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행위이다. 이건 또한 위선과도 같다. 선함을 가장해 상대의 호감과 관심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차라리 떳떳하게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구하는 것만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왜냐 욕망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숨겨야 하는 모순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세상이다.
나는 모태신앙 친구들 사이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는 뭐랄까 낯설지만 익숙한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 느낌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교회는 불편하면서도 가고 싶은 공간이라고 이었다.
"##야~ 교회 가자!"
초등학교 시절 일요일 아침이면 여러 명의 떼를 지어 우리 집 앞에 나타난다. 그럼 다들 이구동성으로 동네 떠나가라 내 이름을 불러댄다. 나는 보통 그 시간이면 일요일 아침마다 방영하는 만화영화에 빠져있곤 했다.
"짝!"
"아얏! 왜 때려?"
"으이구! 동네 시끄러워 죽겠다. 빨리 나가라~ 친구들 밖에서 기다린다. 가기 싫으면 발을 들이지를 말건가 으으구 빨리 나가!"
그럼 엄마가 나의 궁둥짝을 후려 치며 어서 나가라고 한다. 그럼 나는 똥 씹은 표정이 되어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팔이 닿지도 않는 등짝을 어루만지며 썩은 표정이 되어 터벅터벅 마당을 걸어 나가 대문을 열어젖힌다. 그럼 대여섯의 무리가 이빨을 내 보이며 나를 바라본다.
'메롱! 너만 발 뺄 순 없지 않겠냐? 큭큭'
녀석들은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다. 나는 녀석들의 속내를 다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무리 뒤에서 그들을 이끌고 있는 예쁜 대학생 누나가 보인다. 그럼 나의 일그러져 있던 나의 표정은 이내 밝아진다. 친구들은 나의 팔을 잡아끈다. 그렇게 교회로 발길을 옮긴다.
나는 교회 예배당에 울려 퍼지는 찬양을 자장가 삼아 다시 부족했던 아침잠 속으로 빠져든다. 고개가 잘 익은 벼마냥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까닥거린다. 내 옆에 앉은 친구는 나를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이 나처럼 예배시간에 졸았다가는 들이닥칠 후폭풍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습관처럼 예배당에 앉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무언가를 향해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는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면 비로소 나에게 은혜로운 시간이 주어진다. 달콤한 과자들과 음료를 먹으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책이라는 교과서를 보면서 놀아야 한다는 것이 좀 거슬리지만 뭐 학교에서도 항상 교과서를 끼고 노는 것에 훈련되지 않았던가. 마치 교회는 학교의 연장선 같았다. 그래도 교회는 매질은 하지 않아서 좋았다. 수업시간에 졸거나 숙제로 교과서를 외우지 않았거나 해도 교회 목사는 나에게 매질은 하지 않았다. 그냥 상냥하게 잔소리만 했을 뿐. 매질에 비하면 잔소리는 우습다.
"퍽~ 누가 예배시간에 자빠져 자라고 했어!?"
하지만 나의 친구들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면 장로님와 권사님으로부터의 매질이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 혹여 예배시간에 졸았다면 교회가 파할 시간이 될 쯤이면 집에 돌아갈 생각에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야~ 나 어제 아빠한테 낚싯대로 쳐 맞았다"
친구 중에 신앙과 낚시에 둘 다 진심이신 한 장로님을 아버지로 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낚시에만 빠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통스럽진 않았을 거라며 낚싯대로 맞아 피멍이 든 종아리를 보여주며 하소연하던 기억이 아직 떠오른다. 신앙의 강도만큼 매질의 강도 또한 성장하는 듯했다. 나는 교회가 파하면 교회에서 먹다 남은 과자를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이 즐거웠지만 내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 교회는 안식과 재밌는 공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공간이었다.
"야~ 하나님이 어디 있냐?"
"헐! 니가 그런 말을 하니까 너무 충격적인데... 맨날 교회 가자고 찾아오던 너였잖아?!"
아니나 다를까~ 내가 호주로 떠나고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은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부모들도 그들에게 교회에 나가라고 낚싯대를 들지 않았다. 아니 이젠 들 힘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는 얘기할 것이다. 신앙 또한 훈련되는 것이라고. 맞다 틀리지 않다. 하지만 동기 부여가 없는, 이해와 공감이 없는 훈련은 그 훈련을 주관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더 이상 스스로 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종교의 대물림은 반드시 없애야 할 제도적인 모순이다."
- 리처드 도킨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저서에서 얘기한다. 부모를 통해 자동반사적, 그리고 습관적으로 생겨난 신앙이 아이를 망칠 수 있다고. 연약한 아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신앙은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훈련해 나가는 과정임에도 이것을 마치 학교 교육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교육은 그 사회와 국가와 공동체의 시스템과 문화존속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신앙이라는 것도 과연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최재천의 아마존] 중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신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신앙도 결국 신에게 감화되어 생겨나는 것이 아닌 누군가 다른 인간에 의해 교육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종교가 없었다면 자살폭탄테러, 십자군 전쟁, 911 사태, 마녀사냥, 팔레스타인 사태등으로 그렇게 수많은 인간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건 신앙이 만들어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건 종교라는 교육(세뇌)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세뇌된 인간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한 결과이다.
신앙 = 삶
신앙은 삶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신앙이 자연스럽지 않다면 삶 또한 자연스럽지 않게 된다. [이기적 유전자]를 집필한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자이다. 진화생물학의 대가이다. 모든 인류는 유인원에서 진화하고 발전되어 온 것임을 주장하는 그가 신을 인정할리 만무하겠지만 그가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 또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만들어진 신 & 이기적 유전자
신앙은 삶을 변화시켜야 하지만 대부분의 신앙인이라는 자들의 삶이 변화하지 않았기에 도킨스의 이 책은 불티나게 팔리고 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도킨스는 종교의 허점과 단점을 아주 잘 꿰뚫어 본 자일지도 모르겠다.
신앙은 세뇌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과거 한국의 교육제도(주입식)와 발맞춰 세뇌와 암기의 과정을 거쳐왔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해야 하며 피곤한 몸에 졸음이 쏟아지는데도 교회 예배당에 앉아있어야 하고 생각나는 사람도 없는데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 오로지 다른 이들의 시선과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라면 이건 신앙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신앙인이 아니다. 왜냐 나는 매일 성경을 읽지도 않으며 매일 기도하지도 않으며 매주 예배당에 가야 한다는 의무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다만 찬양하면 편해지기에 간다, 이유는 모른다) 나도 한국인이라 시선을 의식하지만 시선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말씀 중에 꽂히는 것이 있으면 마음속에 오래도록 담아둔다. 그리고 그런 유사 상황에 처하면 그것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그럼 나의 행동을 제어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삶을 조금씩 바꾸고 있음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이 땅에 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라는 생각이 드는 것뿐이다.
신이 있건 없건 그 실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이 있다고 믿음으로서 내 삶과 이웃의 삶이 변화된다면 그건 그것 자체로도 아주 의미 있는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변화되기 아주 힘들 환경 속에서 우리를 가둬놓고 변화되는 자들을 지켜보려고 세상을 만들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도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은가 인간은 유희(놀이)의 동물이다. 세상을 놀이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복잡한.
자녀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을 읽어라, 교회 가라, 예배하라, 찬양하라, 기도하라고 자녀에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지금 내가 느끼는 신에 대한 감화와 감동을 자녀도 느끼길 간절히 바란다면 그냥 자신이 읽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면 된다. 그리고 자녀가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발길을 옮기도록 해야 한다. 그 발길이 다른 곳을 향한다고 비난하거나 강요해서도 안된다. 자녀는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 또한 신이 주신 고유한 존재이며 그의 길이 부모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냥 말하지 말고 보여주면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그럼 어느 때가 될지는 모르지만 자녀 또한 신앙의 자리가 안식을 가져다주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것이다.
신앙과 종교 사이
이 땅에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가지는 것과 종교를 가지는 것을 헷갈려하며 살아가고 있다. 종교생활, 종교행사, 종교활동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을 형식(눈에 보이는 관습과 습관)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한국의 교회는 그렇게 신앙을 마치 관습으로 여기며 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랐지만 이건 오히려 신을 그들의이 원하는 모습처럼 만들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또한 남아있는 자들도 이해관계에 얽히고 엮여 마음 없이 몸만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이 적지 않다. 신앙이 종교활동이 되어버린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