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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이에서

욕망과 소명 사이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 열아홉 번째 이야기 -

by 글짓는 목수

"어디서 들리는 소리죠? 많이 듣던 음악인데... 이거 찬양곡 맞죠?"

"오! 아시네요, 별론가요?"

"아뇨, 듣기 좋네요"


오늘은 나의 옆에서 일하시던 전기공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도 크리스천인 모양이다. 나는 종종 일을 하는 가운데 핸드폰으로 가사가 없는 잔잔한 찬양(제가 즐겨 듣는 CCM 피아노 연주곡들)을 틀어놓고 일하는 경우가 많다. 내 호주머니에서 잔잔하게 새어 나오는 찬양이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내 옆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찬양을 듣게 된다.


요즘 찬양곡은 옛날 같지 않아서 가사 없이 들으면 일반인은 이게 클래식인지 뉴에이지 음악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그래서 일반인은 잘 눈치를 체지 못한다. 물론 주변사람 중에 간혹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사람은 찬양곡임을 눈치채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럼 나는 다시 대중가요나 팝으로 음악을 바꿔서 튼다. 좀 아쉽긴 하지만 나 혼자 일하는 공간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의 귀도 생각해 줘야 한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이 잔잔한 찬양곡을 들으며 일을 하면 집중이 잘된다. 알다시피 목수일이 워낙 짜증 나고 힘든 일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이런 음악이 흘러나오면 흥분되고 화가 나는 기분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근데 혹시 모태신앙 아니죠?"

"네 아닌데요, 왜요?"

"음... 역시 범상치가 않더라니 크크큭"

"네?! 무슨 소리신지?"

"신앙은 자유의지로 생겨나야 된다니까"


모태신앙이 어떻길래?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믿음은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자유의지를 통해 가지게 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동물이다. '자유의지'라는 단어는 들으면 긍정적인 느낌이 들지만 사실 이 자유의지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욕망과 소명이다. 전자는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이고 후자는 의지 안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유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내가 얘기하는 자유의지는 욕망이 아닌 소명에 가까운 것이다. 자신이 원하고 자유롭다고 느끼는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심적 상태라고 해야 할까. 욕망과 소명은 비슷한 속성을 가진 듯 하지만 욕망은 끊임없이 다른 비슷한 류의 더 큰 욕망으로 향해가야 자유로워진다고 느끼지만 소명은 크고 작음이 구분 없이 그 소명(행위) 안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누리게 되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종종 이 욕망과 소명을 헷갈리며 살아간다. 소명을 따르며 살아야 진정한 자유함을 얻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쫓으며 자유를 쟁취하려 한다. 자유의지라기보다 자유경쟁에 가깝다. 그 자유라는 것이 경제적 자유, 신체적 자유, 시간의 자유, 타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난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에게서 주는 기쁨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 글짓는 목수 -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이 돈이라는 것이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에서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돈으로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상품이기에 돈으로 거래가 가능하다. 그러니 돈이 없으면 누군가에 거 무언가를 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사랑과 우정과 믿음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마음으로만 표현할 수 없다. 그럼 상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음식도 나눠야 하고 상대가 필요한 무언가를 선물하기도 하고 때론 가고 싶은 곳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해야 한다. 돈(+시간)이 필수적이다. 돈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간을 함께 하는 것 또한 내가 돈을 버는데 쓰는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럼 또 돈이 궁해진다. '시간=돈'이다.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으면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돈은 타인의 시간을 사고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힘을 알기에 그 힘을 얻기 위해 돈을 추앙한다. 그럼 돈을 많이 가진 자를 추앙하고 따르게 되는 논리다. 그럼 돈이 이 된다. 정경유착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경제(돈)와 정치(힘)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 관계와 같다. 미워하지만 또 사랑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의 시간(+노동)을 돈으로 교환하고 그 대신 그 돈으로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주는 기쁨을 누리려 한다. 물론 이 주는 기쁨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타인을 모두 포함한다. 그 기쁨에 취해서 살아간다. 주는 기쁨은 언제나 받는 기쁨으로 돌아옴을 알기에 더욱 기쁘다. Give & Take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유의지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젠 시간을 내어주기 힘들다. 왜냐 시간을 내어주려면 돈을 버는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 과거 우리의 부모님들이 불철주야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시고 자녀와의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 아니었던가.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아이를 유아원에 맡기고 엄마 아빠 모두가 일터로 향해야 했던 건 가난 때문이었다. 가난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수 없고 시간 또한 내어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가난이 무섭고 두려운 이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손에 무엇이라도 가진 자는 더욱 받게 될 것이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조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 [도마복음] 41장 -


그래서 우리는 이 가난을 벗어나려 부단히 도 노력한다. 일단 이 가난부터 벗어나자는 일념으로 살아가지만 참 이 가난이라는 것은 거머리처럼 찰싹 들어붙어서 지독하게 따라다닌다. 왤까? 이건 국가와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노동으로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힘든 절대적인 가난과 삶의 수준이 너무도 다른 즉 빈부의 격차가 만들어낸 상대적인 가난이 있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이 가난은 누구에게나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을 불러일으킨다. 그 간절함은 욕망이고 사회는 그 욕망을 자극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많은 노동과 시간을 내어놓도록 무의식적인 강요를 한다.


빈부의 공존


모두가 부유해지려고 하지만 부는 빈이 존재하기에 부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부와 빈이 갭이 있어야만 인간의 욕망이 발동한다. 즉 자유의지라는 욕망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업자본주의 기차는 이 자유의지라는 연료를 통해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지구상에 극소수의 최고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더 많은 부를 위해 일을 한다. 다만 그들은 그들이 가진 부로 다른 이들의 시간을 사서 더 많은 일을 하기에 더 많은 부를 쌓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빈부의 갭은 줄어들 수가 없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가 돌아가고 전체적인 부는 증대되지만 의도적인 조정과 개입이 없으면 이 부의 편중은 무한대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고 갭을 유지하되 너무 크지 않게 그리고 상대적 가난(자극)은 느끼되 절대적 가난(생존)은 느끼지 않게 해줘야 한다. 그 말은 국민 대부분은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의식주는 국가와 사회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항상 물가잡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가 전복되기 때문이다. 나와 내 가족이 굶어 죽겠는데 눈에 보이는 게 있겠는가? 지금 사는 게 지옥이면 뭐든지 해볼 수 있는 게 인간이다.


또 다른 자유의지 (=소명)


세상이 말하는 자유의지(욕망)는 돈으로 물질의 풍요와 타인의 시간을 사서 자신의 시간적 여유와 더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자신이 좀 더 자유로워진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그럴까? 이 자유함에는 끝이 없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신의 의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이 자유의지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는 듯한 느낌이다. 경제적 자유, 신체적 자유, 정신적(표현)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지금이 희생되고 고통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주 68시간의 노동을 견디며 부를 쌓으려 하고 신체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남 밑에서 일하지 않으려 독립해서 자신의 비즈니스를 하지만 그것 또한 또 다른 더 큰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더욱더 자신을 갈아 넣을 뿐이다. 정신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자신의 말과 표현이 권위적이 되길 바라며 마치 자신이 마치 성인군자인 양 연기하며 실제와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은 내외가 일치하지 않는 삶이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마치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지는 국가와 사회가 지향하고 요구하는 것이지 자신이 진정으로 가지고자 하는 자유의지가 아닐 수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인간은 자신이 진정으로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일(소명)을 부여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물론 국가와 사회가 가장 우선시하는 가시적인 경제발전과 함께 가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자본보다 우선 탄생한 존재임을 감안하면 신은 태초에 만든 인간을 만들 때 이제 기껏해야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산업자본주의를 세상을 고려해서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세상의 부를 다 가진 자들은 신이 그들이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에 아주 적합한 소명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 준 것뿐일 수 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자신이 진정한 자유함을 느끼며 성장하는 인간이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 소명이라는 것이 긍정(선)과 부정(악)으로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이 만든 세상이 모순으로 가득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 저마다의 소명은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란 의미이다. 선인 줄 알았는데 결과가 악이 되는 경우 말이다.


예를 들면 일론머스크가 지구 온난화를 위해 내연기관을 없애려 하지만 사실 전기차의 상용화와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더 많은 전력생산을 위한 설비증대를 통해 더 많은 탄소가 배출될 수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배터리에 들어가는 니켈, 코발트, 납등을 채굴하기 위해 더 많은 자연이 훼손될 수 있음은 간과했다. 그가 지구 친환경을 주창하면서 화성이주를 꿈꾸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면 의구심이 들지 않은가.


나는 지금 무한한 자유함을 느끼고 있다. 이른 아침 조용한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과 함께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무한한 자유 함이다. 이 행위가 경제적 혹은 물질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님에도 내가 이렇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나도 좋은 집과 좋은 차 그리고 좋은 음식을 좋아한다. 그것들에 대한 욕망이 수시로 나를 자극한다. 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자유함을 주지만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에 얽매여 있는 자유 함이다. 나 또한 현실의 욕망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 수는 없지만 이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가고 있다.


욕망과 소명이라는 두 얼굴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욕망과 소명 사이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 욕망과 소명 사이 (영상 오디오)


https://www.instagram.com/reel/C001MjwxU0c/?igshid=MzRlODBiNWFl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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