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글감이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고 기분 나쁜 일일 수도 있다. 기분이 좋다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거나 혹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기분이 나쁘다면 나쁜 사람이거나 아니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의 글감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과는 사뭇 다른 색다른 느낌을 가져다준다.
글은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떳떳하지 않다면 드러나지 않길 원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글감이 되길 원치 않는다. 나는 누군가의 글감이 되고 싶다. 그건 내가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걸 모르고 싶다. 이건 내가 누군가에게 비의도적으로 의미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글감으로 쓰고 또 누군가의 글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글감이 필요하다. 예술가에게 영감이 필요하듯 작가에게는 글감이 필요하다. 물론 작가는 글감에 영감을 더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영감 없이 글감만 가지고 글을 쓰면 설명서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글감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이것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작가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같은 글감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지만 똑같은 글이 되지 않는 것은 작가마다 다른 영감을 가지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다. 무명이다. 그래서 남몰래 글감을 찾는다. 항상 영감을 주는 글감을 찾아 헤맨다. 영감이 있다는 것은 글감이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들은 느낌을 주지만 영감을 주기는 힘들다. 영감을 얻으려면 보려 해야 한다. 본다는 것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곧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좋고(선, 빛) 나쁨(악, 어둠)의 혹은 그 경계의 감정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스토리가 그렇듯 선악의 구도를 벗어날 수 없다. 태초의 이야기가 그러했듯이.
글 = 삶
글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글은 이상이고 삶은 현실이다. 글은 이상을 꿈꾸지만 또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글은 현실에서 글감을 찾고 이상으로 향해간다. 이 말은 작가는 글감을 있는 그대로 쓸 수 없다는 말이다. 글감은 그저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다. 작가는 사실을 나열하는 서기가 아니다. 작가는 글감(대상)에 투영된 이미지를 쓴다. 그 이미지는 작가의 상상에 근거한다. 작가는 대상(글감)의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저 그 글감이 주는 영감을 따라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작이다. 상상이지만 현실에 기초한. 그럴싸한 상상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모든 작가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진 못하지만 분명 작가는 살아온 현실의 시간에서 찾은 글감들로 나머지의 시간을 이상 속 글로 채워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작가는 현실의 시간보다 더 많은 이상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다. 글감보다 글감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더 많은 사람이다. 그럼 그 글은 현실에서 조금씩 멀어져 간다. 판타지(이상세계)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럼 작가는 현실세계를 떠나 자신만의 이상 세계 속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육체는 현실에 머물지만 정신은 이상에 머문다. 이 이상세계가 현실에서 환영받으면 유명해지고 현실과 괴리되면 무명해진다.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본 해리포터(J.K 롤링), 나니아 연대기(C.S 루이스), 피를 마시는 새(이영도)등 이런 류의 판타지도 현실에 기초했지만 현실과 아주 멀리 떨어진 자신만의 이상세계를 구축한 작품들이다. 이런 판타지 세계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왜냐 작가가 마음대로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제약은 없어지는 법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물론 이런 류의 글(이야기)은 호불호가 갈린다. 누군가는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 실화베이스 혹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에 더욱 끌리기도 한다. 최근 한국 영화계를 들썩이고 있는 [서울의 봄]은 사실과 픽션이 섞인 감독(연출)과 작가(대본)가 만든 창작물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거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며 감정을 이입한다.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에 더욱 크게 감동한다.
하지만 이건 분명 픽션이다. 왜냐 우리는 당시의 모든 인물들의 표정과 말과 행동을 모두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기억하고 생각하는 이미지에 투영되어 재탄생된 것뿐이다. 물론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보다는 지극히 현실적 일지 모르나 이것 또한 100% 사실과 일치할 순 없다. 그렇기에 감독은 극 중 인물에 실제와는 다른 이름과 또 다른 픽션을 가미하는 것이다.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심지어 다큐도 픽션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지나온 과거를 생각(관념) 없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이다. 개개인의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내는 것이 또한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픽션을 사실로 인지하는 것이다. 픽션의 리얼리티에 따라서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로 기억된다.
나는 아직까지 판타지를 쓸 만한 깜냥이 되지 못한다. 그만큼 이상세계를 만들 자신도 없고 그 많은 시간을 이상세계에 머물 수도 없다. 나는 항상 현실과 이상 세계의 어디쯤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현실과 이상을 오고 가며 현실에서 글감을 찾고 이상에서 글감을 완성해 간다.
모순을 견디는 일
나는 [글짓는 목수]다. 필명을 쓴다. 작가마다 필명을 쓰는 이유가 있겠지만 필명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나를 구분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작가 또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지만 글은 항상 이상을 향해가야 하는 일이다. 모순 속을 살아간다. 작가는 모순을 견디는 직업이다. 물론 작가가 전업이고 이제 자신의 글이 현실을 초월한 작가라면 이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 이젠 현실보다 이상세계에 더 오랜 시간 머무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기에... 이상이 현실을 밀어낸 사람들이다. 이상 속에 살아도 현실의 삶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적인 작가는 그렇지 않다. 현실과 이상을 모두 품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는 현실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건 다른 모든 예술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술은 곤궁에서 비롯한다. 나의 글도 그랬듯이...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진 듯하다.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나를 동시에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스스로가 무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표정 그리고 행동의 미묘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반응한다기보다 반응 없이 느낀다고 해야 하는 게 맞겠다. 사실 이게 나에게는 적잖은 스트레스다. 변화에 반응해야 하지만 그것을 제어하며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이 힘겹다. 이건 뭐랄까? 광화문에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에 유리 상자를 놓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나도 그냥 그 대로변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살고 싶다. 아니 그런 행인인 척 살고 싶다.
사람들은 자신은 감추고 타인을 들여다 보길 즐긴다. 이건 태초부터 생겨난 인간의 본성이다. 관음이다. 좀 전에 설명한 것과 같이 현실의 인물 그것도 내 주변의 인물의 생각과 삶을 엿본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마치 실화 베이스의 [서울의 봄]과 같은 영화를 보는 듯하다. 실감 나고 생동감 있고 소름 끼친다. 더욱이 일상의 삶에서 실제로 그 인물을 관찰할 수도 있다. 왜 전두환이 죽고 이 영화가 개봉되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가? 당사자가 견디기는 너무 힘든 상황이다. 비록 그가 죽을죄를 지었을지라도... 누군가는 마땅히 받아야 하고 견뎌야 할 죗값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 자나 우리나 크게 다를 바가 없어진다. 우리에겐 타인을 정죄할 권한이 없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타인의 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죄를 잊고 살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흥미롭지 않은가? 그런데 작가는 그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사실을 모른다. 물론 전업 작가가 되어 이상을 꿈꾸는 일이 직업이 되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때부턴 그것은 온전히 작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왜냐 그들이 나의 밥벌이, 즉 현실의 곤궁을 채워주는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는 현실의 삶과 이상의 삶을 분리해서 온전하게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왜냐 작가의 현실이 이상을 방해하거나 혹은 이상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 글감을 찾는 현실이 이상해져 버린다. 그럼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혹은 비의도적인 글감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왜냐 주변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 앞에서 부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왜냐 혹여 자신이 글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누군가에겐 걱정이나 두려움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기대나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걱정이나 두려움이 앞서는 자는 멀어질 것이고 기대나 즐거움이 앞서는 자는 다가올 것이다. 뭐가 되었건 그 자는 작가 앞에서 의도적이게 된다. 의도를 품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관계 속에서 작가는 고통을 느낀다. 물론 이런 고통도 글감이 될 수는 있겠다. 공인이 아닌 사람이 공개되면 삶이 피곤해진다.
나는 끊임없이 글감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글감은 글감인 줄 모르길 바란다. 나 또한 그렇다. 누군가의 글감이 되고 싶지만 내가 누군가의 글감이 되고 있는지 알지 않았으면 한다.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서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미를 가져다주는 존재, 무명하지만 서로에게 유명해지는 존재, 그래야 새로운 것(의미)이 탄생한다. 과거 예수가 수많은 제자들의 글감이 되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