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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03. 2024

나와 나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두 번째 -

"나는 둘이다. 두 개의 나는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다. 그들은 서로 몸이 붙어 있지 않은 샴쌍둥이와 같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르난두 페소아, 그의 이름에서 페르소나(Persona  : 외부에 드러내는 자아의 모습, 외적 인격)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는 실제로 수많은 다른 인격(페르소나)으로 살았다. 이 책 [불안의 서](원제 : The Book of Disquiet 또는 Livro do Desassossego) 또한 '빠스키노'(Pasquino)라는 그가 만든 또 다른 페르소나가 쓴 글로 묘사되어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Fernando Pessoa, 1888~1935)

페소아는 왜 현실의 자신은 감추고 수많은 페르소나를 만들어서 글을 썼을까? 그는 현실에서 보조회계원이라는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글은 다른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만들었다. 그의 현실의 삶 보다 더 리얼하고 생생하게 묘사되고 서사되어 있었다. 그는 글을 쓰면서 수많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자신은 그저 가상의 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고나 할까? 마치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이 자신의 털을 뽑아 여러 분신들을 만들어 내듯이 수많은 다른 (이란성?!) 쌍둥이들을 만들어 여러 가지 원하고 꿈꾸던 삶을 살았다. 그 인물이 무려 75명이 넘었다고 한다. 75명의 샴쌍둥이가 하나에서 탄생했다.  


신기한 것은 수많은 이명(異名)의 인물들은 글 속에서 현실의 자신(페소아)과도 연결(상호 교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실존인 자신과 가상의 그들이 함께 공존하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었다. 현실과 가상이 뒤섞였다.


그는 현실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과 되지 못한 것을 이명의 인물들의 삶 속에서 모두 이루고 누리고 있었기에 그의 현실의 삶은 그저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서버(Server)였다고나 할까? 서버는 현실(Off-line)의 작은 공간에 구축되어 전기(에너지)를 공급받으며 가상의 세계가 꺼지지 않도록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 현실에서는 비록 작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서버 속에는 무한한 우주가 펼쳐진다. 그 서버의 용량과 속도와 성능은 그가 가진 상상력에 기초한다. 그 뇌는 컴퓨터로 치면 구글이나 애플이 가진 서버와 같지 않았을까. 무한한 거대한 세계가 유한하고 조그만 생명에 담겨 있다.


나도 과거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코로나19 락다운 기간 방 안에 갇혀 거의 한 달 동안 소설만 쓰던 때가 있었다. 그땐 내가 나인지 소설 속 인물인지 헷갈렸다. 밥 먹고 잠자고 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글 속에서 보냈는데... 그때 나는 그저 현실에서 숨 쉬고 있는 육체일 뿐 나의 머릿속은 온통 그 인물의 환경과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은 글 속에서 재현되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인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삶이 멈추니 또 다른 삶이 살아났다. 지금은 현실의 삶이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때가 그리워진다. 어쩌면 삶을 산다는 것은 또 다른 나(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보통 평범한 사람들에게 느낌은 산다는 것이고, 생각은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이 삶이고, 느낌은 생각을 위한 영양분과도 같다."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는 아마도 현실의 삶의 시공간을 최소화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는 삶(현실)은 글(가상)이 가동될 수 있는 영양분(전기?! 칼로리라고 하면 맞을까)을 공급하는 곳쯤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는 현실의 삶에 대한 그 어떤 미련도 없었다.


그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에게 현실의 삶이 너무도 힘겹게 다가왔던 경험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나 또한 이런 경험을 했기에 십분 공감한다. 현실의 삶이 너무 곤궁하고 힘들어지면 인간은 현실의 삶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발동한다.  삶에 지치면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다른 무언가가 간절해진다. 현실을 잊고 싶고 도피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은 상황, 그런 상황이 만들어내는 현실의 행동양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누군가 내 삶으로 나를 때리고 있는 것 같다."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첫 번째는 그것들은 잊고 도피하기 위해 다른 중독으로 빠져드는 방식이다. 중독을 통한 망각이다. 술, 마약, 도박, 섹스(성적 쾌락)등의 방식으로 현실의 삶에서 계속 도망친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치는 곳은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현실의 덫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 덫은 치밀하고 견고한 감옥과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 덫을 만든 인간은 그것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며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옭아맨다.


그럼 현실의 육체는 망가지고 결국 육체와 함께 정신도 함께 망가진다. 육체와 정신의 동반 파멸로 가는 길이다. 외부의 물질과 대상을 통해서 얻는 짜릿한 쾌락과 보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쾌락과 보상은 어느새 고통과 체벌로 돌아온다. 이건 스스로에게도 잔혹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잔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중독은 다른 이를 끌어들이는 습성이 있다.  왜냐 이런 중독은 함께 할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술과 마약 도박 섹스 모두 누군가와 함께 해야 제 맛이다. 그럼 쾌락이 증폭된다. 그러므로 전염된다. 그래서 이것들은 세상의 뿌리 속에 함께 살아가는 박테리아처럼 전염되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는 삶에 지친 자신을 다른 곳으로 투영해 마음껏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른 곳은 현실이 아니다. 왜냐 현실에 아무리 호소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지 이미 모두 경험한 뒤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내 맘 같지 않다. 페소아도 아마 이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어느 날부터 현실을 떠나 자신만의 다른 세계를 창조하며 그 안에서 그동안 숨겨두었던 꿈(이상), 즉 이루고자 하는 것과 가지고자 하는 것 느끼고자 하는 것들을 마음껏 쏟아내었을 것이다. 즉 글 속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건 현실에서는 절대 충족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꿈과 같다.


꿈을 꿈속에서 이루는 것이 바로 작가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꿈을 현실에서 이루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은 꿈이 현실을 짓밟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한 가지 혹은 몇 가지 이뤄질지도 모를 꿈을 위해 일생을 허비하지만 작가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여러 가지 꿈을 모두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페소아는 현실의 최소한의 생계와 의식주를 해결하는 삶을 제외하고는 모든 의식을 다른 시간과 공간 속, 즉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서 보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 현실의 자신은 무대 밖의 어둠 속에 앉아있는 관객 중에 하나일 뿐이다. 무대 위의 자신은 자신이 만든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신이다. 그 무대 위의 또 다른 자신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을 연기한다. 그 삶은 자신이 원하고 바라던 삶이다. 그 창조된 삶에서 현실에서 느끼고 경험했던 불평과 괴로움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삶이 막이 내리면 또 다른 인격의 삶의 막을 올리며 마치 연기자처럼 여러 가지 삶을 살아왔다.


"나는 삶에 지쳐 버렸다. 마음껏 불평도 해 보고 내 영혼의 괴로움을 털어놓아야겠다"

                                   - [욥기] 10:1 -


이건 삶의 피난처이자 또 다른 낙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예술이라고 얘기한다. 예술은 또 다른 삶의 형태이자 표현방식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삶이다. 작가는 그 예술의 도구로 글을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이들은 또 그들만의 도구(그림, 음악, 몸짓등)를 이용한다. 다만 작가는 글이라는 아주 보편적인 도구를 쓰기에 아무나 될 수 있지만 누구나 될 수 없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한 번 쓰는 건 쉽지만 자주 쓰는 것은 어렵다. 계속 쓰는 것은 더욱 어렵다.


나 또한 내가 쓸 때 또 다른 내가 존재함을 느낀다. 왜냐 그건 현실의 내가 쓰고자 했던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무언가가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태껏 적지 않은 글을 써왔지만 항상 글의 시작과 끝은 내가 전혀 의도했던 것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이야기의 시작인 영감(글감)을 얻는 것부터 이야기의 끝도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건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쓰는 것이라 믿게 된다. 나는 그렇게 나와 또 다른 나 사이를 오고 가며 현실과 또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기분이다.


오늘도 페소아의 글을 읽으며

나와 나 사이를 오고 가며

한 편의 글을 남긴다.


[불안의 서]


오디오 영상 (릴스)

https://www.instagram.com/reel/C1tqS00RifO/?igsh=MTYwc2I4anNkcm96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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