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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사는 괴로워

평범한 남자 EP 24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꼴뜩꼴뜩꼴뜩"


막걸리가 반쯤 담긴 양은 주전자에 사이다 한 병을 뒤집어 부어 넣는다. 달달한 막걸리는 확실히 목 넘김이 좋지만 뒤 끝이 좋지 않은 게 탈이다.


"벨라~ 생각보다 술 잘 마시는데~ 그런데 여태 뒤풀이도 한 번도 안 오고 그랬어 섭섭하게"

"아녜요~ 술 잘 못 마셔요, 별로 술을 즐기지 않아서요"

"근데 참 어느 학교에서 일해?"

"부산초등학교에서 일해요"

"그럼 제인도 같은 학교?"

"예 벨라 언니랑 같은 학교에서 일해요"


'헐~ 내모교 잖아?!'


우연인지 인연인지 벨라와 제인은 내가 졸업한 모교의 교사다. 리더 피터는 사심 가득한 표정과 눈빛으로 벨라 왼편에 찰싹 들어붙어 앉아 그녀의 술잔이 비워지기 무섭게 잔을 채워주며 이것저것 물어보며 환심을 사기 바빠 보인다. 그러면서 피터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거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입과 손이 분주하다. 그녀의 오른쪽에는 다른 녀석이 바람잡이인 양 피터의 장단에 추임새를 넣어주며 그녀의 정신을 빼놓는다.


"피터 오빠는 영어를 왜 이렇게 잘해요? 저도 오빠처럼 영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개인 과외해줄까? 오빠가 책임지고 네이티브를 만들어줄게 하하하"

“정말요?”


'어이구 가관(可觀)이구만'


나는 그들과 좀 떨어진 곳 앉아 다른 멤버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가끔씩 눈을 돌려 그쪽을 쳐다볼 때마다 벨라와 눈이 마주친다. 그때마다 뭔가 원망스러운 듯이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나를 흘긴다. 막걸리 주전자가 한통 두통 비워지고 다들 취기가 좀 올라올 때쯤이었다.


"자~ 2차는 소주로 고고"

"죄송한데... 전 먼저 집에 갈게요"

"안~돼! 다슨 안 가면 나도 안 갈래요!"

"..."


벨라의 느닷없는 외침에 나뿐만 아니라 다들 당황해한다. 피터는 급히 내 쪽으로 와서는 어깨에 손을 얹고 귀에 속삭인다.


"야~ 인마! 김 빠지게 왜 이래?"

"난 피곤해서 그냥 갈려고"

"헬프미! 같이 가자 좀~ 가는 거다 알겠지? 야~ 다슨 간데"


난 말도 않는데, 피터는 마치 나의 대변인인 양 떠벌린다. 나는 똥 씹은 표정이 되어 2차로 끌려갔다.


"털썩~"


2차로 간 호프집에서 벨라가 나의 옆에 와서 털썩 앉는다.


"다슨! 왜 이렇게 차가워요~"

"뭐가요? 겨울이라 그런가 보지요"

"헐~ 완전 아재 개그! 여자 친구 없죠? 보아하니 있을 수가 없겠네요 쯧쯧..."

"..."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반쯤 풀린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이없는 나는 그냥 고개를 떨구고 핸드폰을 쳐다봤다. 10시가 넘어가고 있다. 오떡이한테 온 부재중 전화가 보인다.


"연락 올 곳도 없으면서 핸드폰은 왜 쳐다봐요~"

"Are you Ok?" (넌 괜찮냐?)

"Yep~ I'm Ok! 푸어(poor 불쌍한) 다슨 제가 한잔 드릴게요"

"됐거든! 내가 알아서 마실 테니 당신은 그만 드심이 좋으실 거 같은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에 놓여있는 잔에 소주가 넘쳐흐를 때까지 붓는다.


"앗~ 쏘리~! 잇츠 풀 오브 마이 어텐션 투 유"

"오~ 술 마시니 영어 발음이 더 낫네"

"리얼리? 땡~~~ 스~"

"다슨! 나 중국어 좀 갈쳐줘요~"

"싫은데!"

"왜요?"

"그냥~ 시간 없어!"

"하아~ 정말 비.. 싼 척은..."


그녀는 테이블에 두 팔꿈치를 올리고 한 숨을 내쉬며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던 머리를 두 손 위에 괴어 올려놓는다.


반쯤 주먹 쥐어진 두 손위에 올려진 얼굴은 볼이 위로 밀려올라가 터질 듯이 탱탱해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턱을 괴고 신기한 곤충 같은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녀는 곤충이 아닌 소주잔을 바라본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벨라~ 뭐해? 오빠랑 한 잔 더 해야지!"


피터가 그녀의 다른 옆자리가 빈 틈을 타서 다시 공세를 펼친다.


"어~~ 그래 오빠! 짠~ 다슨도 같이 짠 해야죠!"


그녀는 잔을 높이 들어 올린다. 균형을 잃은 소주잔이 출렁거리며 잔 밖으로 넘쳐 흐른다.


"그만 좀 마시지~"

"그럼 뭐 다슨이 제 거까지 다 마시던지... 요"

"오~ 흑기사!?"


그녀는 내 얼굴에 술잔을 들이밀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왜?"

"훗! 역시 다슨은 안돼!"


나는 일어서 그녀의 술잔을 뺏으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입으로 잔을 가져가더니 한 입에 털어 넣는다. 동호회 남자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전세(戰勢)는 완전히 뒤집힌 듯하다. 이제는 그녀가 술자리 분위기를 주도하는 듯 보였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그 기세를 몰아 3차 노래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노래방에서 전장에 이슬로 사라져 소파 위에 작렬하셨다. 선봉대장이 작렬한 것도 모르는 듯 나머지 잔당들은 모두 일어서서 흥분에 도가니 속으로 빠져드는 듯 보였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술과 노래에 취해 가고 있었다.


피터도 술에 취했는지 아님 체력이 떨어졌는지 뒤로 빠져 소파에 쓰러진다. 그는 그녀의 옆에 포개져 눕는다. 그런데 녀석의 손은 지치지 않은 모양이다. 노래방 TV 화면의 불빛을 막은 잔당들의 그림자 뒤 어둠 속에서 녀석의 손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러다 갈 곳을 찾았는지 청바지 속 그녀의 불두덩이 속으로 슬며시 손을 밀어 넣는다.


"압~ 머야~~?!"

“에~ 잇 누구야?!"


갑자기 끊어진 노래에 다들 짜증 섞인 탄성 터져 나온다.


"아 쏘리쏘리~~ 예약한다는 게 잘못 눌렀네"


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 피곤한 척 피터의 몸 짓누르며 그 위에 드러누웠다.


“그만 갑시다! 리더도 뻗었는데... 벨라도 뻗고 나도 뻗을 듯... 피터~ 겟 업!"

"퍽!"


피터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아... 아..."


녀석은 내 스매싱에 못 이긴 척 잠에서 깬 듯이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녀는 꿈나라에 간 듯 보인다.


"밸라 언니 어떡해요 정말 뻗은 거 같은데 꼼짝을 않네"

"제인이 좀 데려다줘야겠는 걸"

"저 집이 반대 방향이라서..."

"벨라 집이 어디예요?"

"남천동이요"

"그럼 리더인 내가 데려다줘야지"

"아냐! 나랑 같은 방향이네 내가 데려다줄게, 피터 넌 같은 방향도 아니잖아, 술도 많이 된 거 같은데 니 몸부터 챙겨라"


피터는 아쉬운지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흘겨본다.


‘아~놔! 이 가시네 때문에 뭔 고생이람'


"어이~ 벨라 일어나지 좀!"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치 시체처럼 누워있다. 그녀를 일단 둘러업고 노래방을 나왔다. 이미 시간은 12시가 넘어가고 있다.


"이봐~ 밸라! 집이 어디야?"

“기사님! 일단 남천동으로 가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나의 가슴팍에 계속 얼굴을 묻으려는 걸 손바닥으로 바치고 버틴다.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다며 내 무릎 위에 드러눕는다. 그녀는 한동안 뒤척이다 내 아랫배 속으로 고개를 돌려 얼굴을 파묻으려 한다. 순간 움찔한 나는 그녀의 이마를 때렸다.


"아야!"

"우~~ 우웁 나 토.. 토토 나올 거 같아"

"안~돼!! 기다려~~ 기사님 잠시 좀 세워주세요"

"우~~ 웨엑"


차가 정차하고 뒷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문틈으로 입안의 오물들을 쏟아낸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이봐~ 어서 차에서 내려! 시트에 묻으면 안 돼!"

"아~예~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차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도로변 전봇대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위 속에 남은 잔여물을 쏟아내는 걸 도와야 했다.


"이봐~ 주말 새벽 장사 다 망치겠네 더 이상은 못 기다려 여기까지 요금 만 이천 원 내놔! 다른 차 타고 가!"


기다리다 못한 택시기사는 내가 내민 요금을 낚아채고는 뒷 좌석에 혹시나 오물을 흘리진 않았는지 확인하고는 재수 없다는 듯 쌩하고 떠나버린다.


"우~욱"

"괜찮아?"

"다슨...오빠?! 여기서 뭐하세요?"

“나 참! 어이가 없네"


그녀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가에 흐르는 위액 섞인 국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녀의 입에서 역겨운 냄새가 같이 올라온다. 속에서 다시 신호가 왔는지 그녀는 고개를 숙여 또다시 토하기 시작한다. 한참을 그렇게 전봇대를 부여잡고 씨름하더니 지쳤는지 이내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린다.


"이거 완전 개 꽐라네 야~ 안돼 일어나! 집 어디야?"

"읍… 주글꺼 가타"


그녀는 나의 부축에 버드 나뭇가지 늘어지듯 축 늘어져 나를 어깨를 짓누른다.


"이이 이잉 이이 이잉"


그녀의 가방에서 진동소리가 들린다. 난 그녀의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확인한다. '꼰대 아빠' 그녀의 아버지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방법이 없다.


"여보세요"

"잇! 당신 누구얏?"

"예? 저는..."

"뭐하는 녀석이야? 너 뭔데 이 시간에 내 딸 전화를 받는 거야?"

“아니… 저 그게…”


분노가 섞인 우렁찬 목소리 때문에 핸드폰에 귀를 가져다 댈 수가 없다. 일단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떼어놓았다. 폭포수 쏟아지듯 한참을 쏟아내던 목소리가 좀 잦아들 때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의 위치를 물었고 이곳에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한다.


그녀의 집도 어딘지 모르고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초겨울 자정이 넘은 새벽 살 속을 파고드는 차디찬 바람이 부는 도로가에 서서 술에 쩔은 여자를 부축하고 서있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


10분쯤 흘렀을까? 검은색 벤츠 한 대가 우리 앞에 선다. 목소리로 미뤄 예상했던 꼰대 아빠가 모습을 드러냈다. 험상 굳은 표정에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에 배가 나온 우람한 체격의 몸을 차에서 꺼내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너냐?"

"퍽!"


그는 그 한마디 후에 벨라를 한 손으로 낚아채고는 주먹으로 나의 뺨을 후려친다. 바닥에 쓰러졌다. 알고 보니 손바닥이었다. 손이 얼마나 두툼한지 주먹인 줄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 싸대기 영어 선생의 스매싱을 또다시 느낄 수 있었다. 싸대기 영어선생이 아녔다면 아마 유체이탈을 여기서 처음 경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야~ 너 내 딸한테 무슨 일 있었으면 뒈질 줄 알아, 알겠어?"


난 그저 말없이 한 손으로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차 뒷좌석에 쑤셔 넣고는 괭음을 내며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뇌가 제자리를 찾는 동안 멍하니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의 한쪽 어깻죽지는 그녀가 흘리고 간 정체모를 액체로 젖어 고약한 향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선의(善意)의 행동은 때론 악의의 행동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함부로 선의를 베풀어선 안 된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흑기사는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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