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23 (개정판)
[요즘 많이 바빠? 주말에도 연락도 없고, 문자 보면 연락 좀 해]
오떡이의 문자 메시지다. 진동소리에 문자 내용을 본체만체 핸드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I'm sorry!"(미안해)
"No worries. I don't care."(괜찮아, 상관없어)
"Thanks anyway" (고마워)
영어 회화 수업이 한창이다. 여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연령제한이 없어 어리게는 중학생부터 많게는 60대 어르신까지 연령대가 광범위하다. 영어공부에 남녀노소가 없다. 물론 주요 연령층은 20~30대의 대학생 혹은 직장인들이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 아니 아이가 하나 있다. 까까머리를 하고 얼굴엔 여드름이 가득한 앳된 모습의 중학생이다. 자식 교육에 극성인 한 어머니가 매주 주말마다 자녀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아이와 함께 영어공부를 한다. 자기 딴에는 또래 애들과 달리 어른들과의 수준 있는 대화 스킬을 익혀야 한다는 차별화된 자녀 교육방식인가 보다.
녀석은 중학교 1학년인데도 영어회화 실력이 중급 이상이다. 교실에 있는 웬만한 대학생 형이나 누나들보다 낫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더니 어머니의 정성이 자식 영어 실력 향상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는 듯 보였다. 한창 또래 아이들과 놀아야 할 나이에 주말까지 대학생과 직장인들 뜸에 끼여 애늙은이가 되어가고 있다.
엄마를 따라 끌려온 중학생이나, 이직을 위해 영어 스펙을 쌓는 나나, 취업을 위해 밤낮없이 공부하는 다른 대학생과 취준생들이나, 승진이나 인사고과를 위해 공부하는 다른 직장인들이나 모두 주말에도 쉬지 못한다.
중학생의 어머니는 아마 집에선 아들에게 영어 못하면 자신도 나같은 형, 누나들처럼 커서도 주말도 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뭐 그러고 보면 나나 다른 사람들은 중학교 때부터 저렇게 열성적으로 주말까지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나는 저 나이에 친구들과의 보냈던 추억이라도 남아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화 수업은 대학교 강의실을 빌려서 운영한다. 동호회 운영진이 해당 대학교 학생회 간부 출신이라 학교 시설물을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다. 영어회화 수업으로 주말마다 대학 캠퍼스를 거닐다 보니 다시 풋풋한 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Dawson! why do you study English here? (다슨! 왜 여기서 영어공부해요?)
"Well..."(음...)
“I know you already have a stable job. Is it necessary to spend all your weekend here?" (내가 알기론 이미 안정된 직장도 있는 걸로 아는데 굳이 주말을 여기서 다 보낼 필요가 있어요?)
다슨은 나의 영어 이름이다. 3번째 자유토론 시간이다. 잔머리 하나 없이 검은 생머리를 단정히 빗어 내린 새침한 숙녀가 한국인에게 익숙한 콩글리쉬 발음으로 본문 주제와 상관없는 질문을 던지고는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주시하며 답을 기다리고 있다.
"Well... Actually I'm not satisfied of my job. That's why I study English here for getting a better job in the near future." (음... 사실 난 직장이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영어 공부해서 가까운 미래에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려고 해요)
"Wow~ That's great! You're a challening person."(와~ 대단해요! 도전적인 사람이네요)
그녀는 나의 대답에 감탄한 듯이 나를 추켜세운다.
클래스 수준이 초중급이긴 하지만 사람마다 회화 수준 편차가 적지 않아 실력 차이가 큰 사람이 파트너가 되면 대화가 한쪽으로 치우쳐 재미가 없다. 다행히도 나의 회화 수준은 그녀와 대화하기엔 여유 있어 보인다. 둘은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지만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회화 동호회 수업에는 직장인들도 있지만 구직 중인 대학생이나 실업자인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직장을 다니면서 주말마다 이직을 위해 공부하는 게 대단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 입장에선 내가 배부른 놈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What about you, Bella?" (넌 벨라?)
그녀의 영어 이름은 벨라다. 나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용 정리가 된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다시 말을 이어간다.
"Honestly speaking, I like traveling abroad, I go to travel abroad every vacations. that's why I'm studying English. Hmm... I want to have conversation with foreigner freely hmm... in overseas.
(솔직히 말해서 난 해외여행을 좋아해서 방학 때마다 해외 나가요. 그래서 영어 공부해요. 음... 자유롭게 외국인과 대화를 하고 싶어요 해외에서)
듣고 보니 나보다 더 배부른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앉아있다.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방학만 되면 해외여행을 간다는 그녀는 우리 클래스에서 최고 갑인 듯 보였다. 많은 이들이 생존을 위해 영어를 공부하지만 그녀에게는 여가를 위한 것이었다.
같은 반엔 그녀와 회화 파트너가 되길 바라는 수컷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복불복이다. 리더가 수업 시작 전 나눠주는 트럼프 카드의 같은 숫자를 가진 자들만이 그날의 인연이 된다. 그녀는 반에서 여러 싱글 수컷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지만 나에겐 왠지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반감이 들었다.
"I heard that you can speak Chinese well, is it right? (듣기로 중국어 잘하신다던데 맞아요?)
'어떻게 안 거지? 내가 누구한테 얘기를 했었나?'
그녀는 내가 중국어를 한다는 걸 어디서 들은 모양이다.
"Well... actually I majored Chinese when I was a university student."(음.. 사실 중국어 대학 때 전공했어요)
"Wow! Please show me your Chinese!" (와우! 보여줘요 중국어!)
"hey! It's English class you know"(헤이 알다시피 여긴 영어 클래스예요)
"It's ok if you don't speak Korean in this classroom" (괜찮아요, 교실에서 한국어만 쓰지 않으면)
"哎呀! 你别闹了 跟你說汉语都没什么意思!" (아이고! 그만하시오, 너랑 중국어로 얘기해봐야 의미 없다!)
"Wow~ what does it mean?" (와우~ 무슨 뜻이에요?)
"It's just a good meaning for you, 흐흐흐" (그냥 좋은 말이에요)
그녀는 나의 말끝에 첨가된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간 야릇한 웃음에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노려본다.
"너무 치사한 거 아녜요! 헉! 아잉~ 어떻게…"
"Oops! you spoke Korean!" (웁스! 한국어 말했다!)
그녀는 순간 움찔하며 주변을 휙 한번 둘러본다. 기다렸다는 듯이 클래스 리더는 고개와 검지 손가락을 양쪽으로 흔들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가온다.
"I feel sorry that you have to pay the fine 5000 won for this.(안타깝지만 벌금 5000원 내셔야 합니다.)
그녀는 클래스 리더에겐 불쌍한 표정을 나에겐 노여움이 섞인 표정으로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주섬주섬 가방에서 지갑을 꺼낸다. 그리고 만 원짜리 한 장을 리더에게 건넨다.
"I don't have changes now, I'll give you back 5000 won later."(지금 잔돈이 없어서, 나중에 5000원 거슬러 드릴게요)
“Ok..."
"Hey everybody! time's up, please wrap things up buddies" (여러분! 시간이 다 됐습니다. 마무리해주세요)
나의 첫 잉글리시 컨버세이션은 이렇게 풀리지 않은 감정의 여운을 남기고 끝이 났다.
"다슨님! 덕분에 처음으로 벌금도 다 내보내요!"
"뭐~ 벌금은 클래스 회원들을 영양 보충을 위해 쓰인다니 너무 아까워 마세요, 아쉬우심 뒤풀이 가셔서 많이 드시든가요 하하하"
"하~앗 그… 그래요 그래야겠네요, 오늘 그 잘난 중국어 좀 한 번 들어봅시다"
"전 중국어로 혼잣말은 안 해요, 중국어로 물어보심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
그녀는 나의 뻣뻣한 태도에 더욱 발끈한 듯 보인다.
"자~ 그만들 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갑시다 갈 거죠? 남은 얘기는 뒤풀이 가서 코리안 랭귀지로 맘 편히 하자고요!"
클래스 리더가 우리 둘의 대화를 가로채며 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를 그녀 곁에서 떼어 놓는다.
"희택아~ 어째 벨라도 가겠데?"
"어 간다는데..."
"정말? 대단한데 너~ 굳 잡!"
"뭐가 좋아?"
"벨라~ 쟤 여태껏 한 번도 뒤풀이 안 갔었는데... 이번이 첨이야"
팀 리더인 피터는 그녀가 들으면 안 되는 듯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그는 나랑 동갑이다. 지난번 클래스 뒤풀이 때 친해져 친구가 되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정돈되지 않은 듯한 파마머리, 얼굴에 살이 없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광대뼈가 인상적이다. 그는 품이 한 치수 큰 셔츠를 즐겨 입고, 항상 목에 커다란 보스 헤드폰을 걸고 미니밸로 자전거 혹은 킥보드를 타고 나타난다. 뭔지 모르지만 아직은 사회에 때가 묻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인다.
그는 해외에는 한 번도 나간 본 적이 없는 순수 국내파 영어 고수다. 나름 자신만의 체계적인 공부 방법으로 학습했다나 어쨌다나, 어쨌든 영어회화는 수준급이다. 부러운 녀석이다.
"오~오늘 벨라님도 뒤풀이 가시는 거?!"
그는 한 손으로 킥보드를 끌고 한 손은 나의 어깨에 올리고 나의 어깨너머로 뒤를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예~ 갈게요! 제인도 같이요!"
그녀는 옆에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여자애를 가리키며 대답한다.
"저도 오늘 뒤풀이 참석요!”
“저도 오늘은 시간 될 것 같아 참석할게요”
그러자 그녀들 뒤를 따라 걷던 몇몇 남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쪽을 향해 참석 의사를 얘기한다.
"야~ 희택아~ 오늘 뒤풀이 풍년인데 볼만 하겠는걸 흐흐흐"
"....?!"
피터는 음흉한 미소를 내비친다. 우리는 저렴한 대학가 포차에 모여 앉았다. 대학교 개강총회 뒤풀이 같은 분위기는 나만 느끼는 걸까... 주변에 대학생들의 생기발랄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싫지 않다.
그렇게 대학가에서 영어와 술이 뒤섞여 간다.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