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22 (개정판)
제2 외국어인 중국어는 특별하지만 보편적이지 않다.
중국어는 할 줄 알면 플러스 알파이지만 몰라도 크게 크게 아쉬운 건 없는 그런 능력이다.
나에게 가장 시급한 능력이 바로 영어였다. 영어+중국어는 정말 환상적인 조합이다. 세계 최강 국가의 언어와 전 세계 인구의 1/3이 쓰는 언어를 마스터한다면 어딜 가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나의 영어 실력은 안타깝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을 보내면서 항상 따라다닌 잉글리시였지만, 왜 그렇게 친해질 수 없었을까... 그때까지 영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학창 시절 수많은 영어 선생들을 겪어왔지만 나에게 영어에 대한 흥미를 가져다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불꽃 싸대기 영어 선생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의 수업시간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가 교실에 입장한다.
교탁에 교재를 놓고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집게손가락으로 한 번 추켜올렸다 내리면서 일그러진 얼굴로 교실을 한번 쓰윽 훑어본다. 그가 입을 열고 하는 첫마디는 번호를 호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번호를 호명하기까지 교실에 모든 학생들은 숨 죽여 교과서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8번!"
싸대기가 나의 번호를 호명한다. 심장이 고장 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나는 교재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 시간에 배웠던 영어 본문을 소리 내어 줄줄 외워야 한다.
"The novel confronts that really difficult...... and... related......"
말문이 막히면서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탁!"
그는 천천히 손목에 매달려 있는 진품인지 가품인지 모를 묵직한 금빛 롤렉스 예물시계를 교탁에 풀어서 내려놓는다. 인상을 찌푸리며 말없이 손짓한다. 나는 교실 앞으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는 왼손으로 나의 볼을 크게 잡아 꼬집어 들어 올린다. 볼 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나의 얼굴이 비스듬히 틀어질 때쯤 아래에서 세찬 바람과 함께 뭔가가 쳐 밀려 올라온다.
"퍽!"
순간 머릿속의 뇌가 두개골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는 진동이 느껴진다.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기분이다.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몸은 충격에 튕겨나가는데 영혼은 미처 따라가지 못해 시간이 길게 늘어지며 영혼이 몸에 따라붙을 수 있을 시간을 벌어주는 것 같다.
영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을 땐 교실 문에 처박혀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턱이 얼얼하다. 아직 끝이 아니다. 그는 쓰러져 있는 나를 다시 볼을 꼬집어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다시 날아온다. 한 번 당한 뒤라 이제는 영혼도 미리 준비를 하고 몸과 함께 간다. 그렇게 수 차례 스매싱이 이어진다. 얼굴 한 면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걸 확인한 싸대기 선생은 교탁으로 돌아가 다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번호를 호명한다.
이제 나는 긴장을 풀어도 된다. 그 순간 찾아오는 안도감은 그 동안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낀 그 어떤 것 보다도 컸다. 가장 두려운 시간과 가장 안도하는 시간은 항상 같이 있게 마련이다.
놀라운 사실은 싸대기 영어선생은 다음 타자로 갈수록 스매싱의 파워가 더 증가한다는 것이다. 스매싱 강화를 위해 매일 테니스를 친다는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무성했다.
그렇게 영어는 나에겐 공포로 각인되었다.
반면 영어와는 달리 중국어는 정말 재미있고 흥미롭게 공부했다. 3년 만에 중국어 고급 자격증을 따고 중국인들과 자유롭게 회화를 할 정도가 된 걸 보면 우리나라 영어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똑같이 인간이 쓰는 언어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주입식 영어교육의 폐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번은 스키장에서 스노 보드를 타다가 급강하하는 스키어에게 뒤에서 공격을 당한 적이 있다. 상대방이 부딪칠 때 앞으로 뻗은 스키봉을 쥔 주먹이 나의 얼굴을 강타했고 난 5m쯤 날아가 꼬꾸라졌다. 입술이 다 터지고 이빨도 흔들릴 정도의 큰 부상이었다.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Are you Ok?"
"헉... I'm fine thank you, and you?" (난 괜찮아, 고마워, 넌?)
난 순간 들려온 영어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자동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말을 해놓고 나 스스로도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 상황에 고맙다는 말을 하다니 거기다 상대방의 안부까지 묻는 어처구니없는 센스까지 녀석도 족히 당황스러웠을 거다.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 1과 본문 내용이 무의식적으로 뛰어나온 것이다. 주입식 교육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인생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영어 스펙은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다. 이직을 위해 토익 성적과 영어면접을 위한 스피킹이 시급했다.난 영어회화 동호회를 찾기 시작했고, 주말을 이용해 영어회화를 공부했다.
영어동호회 시스템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하루에 3시간으로 이뤄져 있고 1:1로 수업이 진행된다. 시간마다 파트너를 랜덤으로 지정해서 지정된 파트너랑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물론 교실에서 한국어는 허용되지 않으며 썼을 경우 벌금을 부과하는 식으로 엄격하게 운영된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1:1 방식이라 영어를 많이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첫 시간은 전주에 배웠던 dialogue를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외워야 한다. 문제는 전주부터 전전주까지 한 텀에서 배운 것을 누적해서 외워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분량이 많아진다.
두 번째 시간은 새로운 dialogue를 A와 B가 되어 호흡을 맞춰 주어진 시간 안에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 안에 외우고 리더(진행자)에게 확인을 받으면 부상으로 5천 원권 문화상품권 주어진다.
세 번째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시간으로 파트너랑 시사적인 내용을 다룬 본문을 읽고 몇 가지 질문(question)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구사해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리고 영어회화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수업 후 어울려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 또한 한 주의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었다. 나의 모든 주말은 영어와 이직을 위한 스펙 쌓기에 모두 할애되었다.
그렇게 일과 공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