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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평범한 남자 EP 21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희택 씨, 본사 인감이랑 명판 도장 좀 부탁해"

"예, 조부장님~ 또 채무 보증 건인가요?"

"응! 그렇게 됐네~ 공장에 들어가야 할 돈이 적지 않네"

"헉! 30억이 나요? 이번엔 좀 많네요"


요즘 들어 내가 하는 업무 중에는 자회사(계열사) 채무보증 관련 업무도 추가되었다. 자회사 관리업무를 하다 보니 국내외 계열사들의 재무상황 또한 항상 업데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광양에 3만 평의 부지를 매입해서 선박블록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사업 초기부터 빚으로 시작해서 빚만 늘어간다. 가시적인 매출 성장이나 이익은 전무한 상황이다.


물론 한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에 국내외 자회사 재무담당자들이 자주 본사를 들락거린다. 자회사 재무보증을 위한 은행 제출 서류에 본사 대표이사의 최종 승인을 받고 본사 인감을 받으러 오는 것이다.


자회사들의 매출과 이익은 줄어들거나 답보(踏步) 상태인데, 호황기 때 더 큰 호황을 기대하고 무리하게 추진했던 사업 확장이 고정비용 증가라는 부메랑이 되어 뒤통수를 치고 있는 실정이다.


"희택씨야, 또 재무보증 건이야?"

"예 그러네요"

"아~놔! 이러다 본사도 휘청 하겠는걸… 자회사 채무 보증 건 공시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해야 해? 주가도 계속 바닥을 치는데, 내일~ 또 전화기에 불나겠구먼, 요즘 밤 길이 무섭다. 이러다 나 어디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거 아닌가 몰러"


주담(주식 공시담당자)인 상훈 씨는 연신 짜증 섞인 말투로 투덜거린다. 회사는 빚만 늘어가는데… 사장은 어딜 다니는지 일찍 회사를 나가는 일이 잦다.


회사 상황이 갈수록 좋지 않은 상황에서 비싼 컨설팅 비용까지 들여가며 전사 원가 절감 프로젝트까지 진행하기 시작했다. 더 나쁜 소식은 그 업무까지 나에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컨설팅업체의 사장은 다름 아닌 사장의 대학 후배인데, 장발의 파마 머리에 받쳐 입은 정장이 비즈니스 맨이라기 보단 유흥주점 웨이터 같은 느낌이다. 가끔씩 회사에 번쩍이는 붉은색 재규어를 끌고 나타나서는 사장을 태우고 함께 어디론가 총알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와이에서 둘이 제법 잘 어울려 다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난 그 컨설턴트 사장이 남기고 간 그의 졸개들 아니 컨설턴트들과 매일 마주한다. 검은 슈트에 검은 구두 갑갑하게 조여 맨 넥타이까지 맨 인 블랙의 주인공들처럼 차려입은 두 남자가 회의실 하나를 전세 내고 나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댄다.


그들의 심부름센터가 된 기분이다. 일과 시간 중엔 나의 업무를 할 틈이 없을 정도이다. 결국 그들이 퇴근하고 가면 회사에 남아 나의 업무를 처리해야 하니 집에 갈 수가 없다. 회사에 '라꾸라꾸' 침대라도 놓고 노숙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희택 씨, 각 사업소에 부서별 TFT (Task Force Team) 멤버들이랑 회의 일정 좀 잡아주시겠어요?"

"전 부서를 다 말입니까?"

"예~ 원가절감 프로젝트를 위해 각 부서별 KPI(Key Performance Indicator) 선정을 위해 담당자들과 회의가 불가피할 것 같네요"

"그 말씀은 전 부서 담당들과 각각 협의해서 KPI를 설정한다는 말인가요?

"예 그래야겠지요"


컨설턴트의 요청에 나는 폐 속 깊숙이 묵혀있던 이산화탄소가 모두 쏟아져 나올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땅은 꺼지지 않는다.


'아~ 전사 그 많은 부서들과 미팅을 언제 다 하려나... 부서만 30개가 넘는데...'


전사 프로젝트를 사원인 나 혼자서 감당한다는 게 합당한 건지 의구심이 커져갔다. 다른 부서원들은 그대로인데 나만 일이 많아진다고 느끼는 건 착시현상인 건가? 그렇게 전사 미팅 투어가 시작되었고, 난 매일 반복되는 부서별 프로젝트 회의 참석과 회의록 작성으로 일과시간을 다 보낸 후 회사에 남아 본 업무를 쳐내느라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툭 툭 툭"

"아이고 우리 자갸가~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드네 왜 이리 갈수록 야위어 가노, 회사가 사람 잡겠네~ 오늘 이 누님이 몸보신 좀 시켜주게, 뭐 먹고 싶니? 말만 해~"

"야~ 제발 좀… 그냥 냅둬줄래?"


오떡이는 축 쳐진 내 모습을 보자, 장난 섞인 궁둥이(엉덩이) 팡팡 콤보를 날리며 위로 아닌듯한 위로를 하려 애쓴다. 그녀의 마음은 알지만 받아줄 여유가 없다.


가을 한적한 일요일 오후에 찾은 바닷가, 벤치에 앉아 수면에 반사되어 얼굴을 때리는 햇살이 싫지 않다. 그 얼굴의 온기가 온몸으로 전도되어 서늘한 바다 바람을 잊게 만든다. 나와 그녀는 그 기분 좋은 햇살의 나른함에 취해 있다


"야~ 넌 내가 뭐가 좋냐?"

"생뚱맞게 갑자기 웬 직설 의문문이래?"

"장난 아니고, 진지하게 묻는 거야"

"음... 글쎄... 그냥 편해, 옆에 있으면"

"나랑 같네..."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나와 달리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나의 어깨에 살포시 전해지는 중량감과 이제는 익숙해진 그녀의 익숙한 샴푸 향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난 잘 살고 싶어~"

"응? 무슨 말이야?"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고"

"지금도 잘 살고 있잖아"

"더 큰 회사에서 연봉도 올리고 빨리 크고 싶다는 말이야"

"…"


하소연인지 푸념 섞인 다짐인지 모를 나의 넋두리를 그녀는 그냥 조용히 듣고만 있다. 바닷바람에 차가워진 그녀의 손이 나의 허리 속을 감아 돌며 나를 움켜 안는다. 그녀의 말없는 몸짓이 나에게 더 말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그녀는 나를 바라봤다.


"벌써 다 왔네"

"응, 그러네"

"..."


어둡고 좁은 산비탈에 집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멀리서 바라보면 운치있어 보이지만 그 안에선 운치를 찾아볼 수 없다. 사이사이 좁은 골목길은 차 한대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다. 가로등 불빛은 어둠에 거의 집어삼켜질 때쯤 하나씩 듬성듬성 서 있다. 그 가로등 아래 세워진 차 안의 어둠 속에서 우리 둘은 눈을 마주하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시선을 마주치고 어색해질 때쯤 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어졌을 것이다. 포개진 입술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어삼켜지고 나의 빨라지는 심장 박동은 식어 있던 나의 손을 데우며 살며시 그녀의 하얀 속살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어색한 시간이 한참을 지나도록 마주 보고 있다. 나는 입고리를 올리고 눈썹을 살짝 들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제야 잊어다는 듯 차 문고리를 당긴다.


"들어갈게~, 운전 조심해서 가~"

"어.. 그럴게"


차의 시동을 켜고 후진기어를 넣는다. 눈 앞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 뒤로 산 중턱에 계단처럼 쌓아 올려진 빼곡한 집들이 저마다 등대 인양 먼바다를 향해 빛을 내뿜고 있다. 그 불빛은 바다를 밝히지만 불빛의 뒤는 더욱 어두워 보인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그녀의 모습이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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