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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 Apr 06. 2023

다 큰 어른이 담을 넘는다.

삐삐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아파트 낮은 담장에 다리 한 짝을 걸치고 있다.

나머지 다리 한 짝을 휙 넘기더니 폴짝 뛰어내린다. 착!


순간 나도 모르게 속으로 아이쿠 한다.

'아유 그 짧은 다리로 잘도 넘네. 다치믄 어떡할라고'   

한 두 번 넘어본 솜씨가 아니다.

'여기는 원래 이렇게 재밌게 넘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거예요'라는 듯

절도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동작에 피식 웃음이 나려던 찰나,

가만 저 아이.. 넘의 집 딸이 아니다. 내 딸이다.  

눈이 많이 나쁜 애미는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 대범한 삐삐가 제 자식이라는 걸

알아챈다.

"거기 학생! 동작 그만~~"


내 목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보더니 "아, 엄마~~" 배시시 웃는다.

"아니, 왜 여길 넘어 다녀~ 위험하게"

"삥 돌아가야 되잖아. 어떤 오빠들도 넘고 어떤 아줌마도 여기로 다녀. 우리 반 민서두~

그리구 엄마, 여기는 넘기 딱이야. 봐봐 여기만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파트 주변으로 빙 둘러져 있는 울타리라고 해야 할까.

그 낮은 담장 따라 장미 덩굴이 자라고 있는데 딱 거기만 없다. 넘는 사람들이 있어선지, 아니면 원래부턴지는 알 수 없지만.


"에이, 그래도 웬만하면 입구로 다녀"


그때는 몰랐다. 머지않아 내가 그 담을 넘게 될 줄은.  






그 시작은 급하게 외출하는 길이었다. 바쁘게 걸어가다 하필 그 휑한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 아니야. 애들이 볼라' 내 이성은 평소처럼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횡단보도라도 건너는 것처럼, 이쪽저쪽 좌우를 살폈다. 그다음 휙 넘었다. 자동으로 뒤를 돌아보게 됐다. 외진 곳이라 아무도 없었다.

'뭐지. 뭔가 혼날 거 같은데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이 기분은' 탁 하고 두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뭔가가 무장해제되는 기분이 들었다.



다 큰 어른이 잘하는 짓이다!



이런 소리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그 이후로 난 몇 번 넘지 말아야 할 그곳을 넘었다.


아무리 낮은 울타리라고 해도 멀쩡한 입구 놔두고 거길 넘어 다니는 일은 뭔가 어른스럽지는 못한 일일 거다. 예전에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정해진 규칙,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지내왔으니까.


늘 도처에 널려 있는 남들 눈을 의식하며 살아왔던 나다.  살다 보면 살짝 벗어날 수도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어도 내 안의 어떤 무언가가 날 꽉 붙들고 '이렇게 해야 돼! 저렇게 해야지!' 사사건건 참견을 해왔다.

 

가끔 이런 내 모습에 내가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익숙하게 입고 있는 내 이미지를 확 벗어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걸 깨기란 쉽지가 않다. 내가 만들어 걸친 거지만 내 의지대로 벗을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40년 넘게 지금껏 살고 있는 지금 여기 말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아는 나' 말고

'되고 싶은 나'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웹드라마 '도시 남녀의 사랑법'에는 이런 나와 비슷한 은오라는 여주인공이 나온다.  평생을 FM 스럽게 살아온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예비신부다. 그런데 날 잡고 청첩장까지 찍은 어느 날, 예비 신랑의 바람을 목격하게 된다.

"사실 난 이미 니가 질렸었어. 너도.. 알고 있었잖아?"


뻔뻔한 남자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변명이라고 뱉는다. 설상가상으로 그날 그녀는 면접 본 회사에서 채용이 취소되었다는 통보까지 듣게 된다. '자신감 없어 보임'이 채용 취소 이유다.


배신을 투 펀치로 맞은 그녀는 그 길로 바닷가 마을로 떠나고,

그곳에서 180도 다른 사람으로 살기 시작한다. 긴 생머리, 단정한 옷 스타일도 다 집어던진다.

좋으면 "너무 좋아" 신나면 "너무 신나"

머리도 옷도, 마음도 히피처럼 그야말로 거침없이 지낸다.





남들 눈치 보지 않는 자유영혼이 된 그녀에게 과하게 감정이입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판타지스러운 일이다.


현실은 지금 이 자리, 익숙한 모습의 내가 있다. 차마 도전 못 했던 과감한 스타일 원피스를 여행 가방에 큰맘 먹고 챙겨 넣어보지만 결국 입지도 못하고 도로 고대로 갖고 오는 것처럼.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학창 시절에도 안 넘었던 담이라는 걸 넘어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허리께 오는 담을 넘으며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휙 지나가는 걸 보면

내 안에 넘고 싶은 뭔가, 깨고 싶은 뭔가가 그득그득한가 보다.

만리장성처럼 쌓아 놓은 그것들을 넘어볼 용기는 차마 못 내고 이 나이에 아파트 담이다.

사춘기를 사춘기답게 못 보냈더니 갱년기 즈음에 사춘기까지 1+1으로 함께 오는 걸까.

 

아파트 담 말고, 내가 쌓아 올린 담을 넘어보는 건 언제쯤 가능할까.  


어쩌면 다음 생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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