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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rie Sep 13. 2021

청춘(靑春) : 푸른 봄

당신의 청춘은 안녕하신가요?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청춘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이십 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요즘엔 청춘의 범위가 늘어났기 때문에 못 본 척을 해 본다. 아무튼 청춘이란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다.


봄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실로 숭고하고 거룩하다. 깨어나는 만물, 만개하는 꽃, 새로운 학기, 무수한 처음, 오케스트라의 시작……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사람의 찬란한 순간을 봄이 모두 독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청하, 청추, 청동이 아니리 오로지 ‘청춘’이어야 하는 것이다.


막상 청춘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중함을 잘 모른다고 한다. 오히려 인생의 가을이나 겨울에 이르러서야 그 당시를 추억하며 몹시도 그리워한다고 한다. ‘내게도 그토록 생기가 있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그런데 나는 꽤 오래전부터 ‘청춘’이란 단어를 동경하고, 추앙해왔다. 청춘이면서 청춘을 동경한다라. 아무래도 나는 스스로를 사회가 기대하는 ‘눈부시도록 찬란한’ 청춘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모양이다.


나는 청춘 가장자리에 서서 스테이지 위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방관자에 가까웠다.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곧 물러나야 하는 처지를 직감하면서.


스테이지 위엔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함께 어울려 춤을 춘다. 그 위에선 연애가 시작되기도 하고, 우정이 단단해지기도 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패기 넘치게 뛰어오르기도 한다. 분명 그 과정에서 이별도, 좌절도, 실패도 있지만, 스테이지의 조명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고르게 내린다.


조명 아래의 그들은, 꽃가루가 사방에서 터지는 공간 속의 그들은, 풋풋한 꽃내음을 풍기는 그들은 분명 빛나고 있었다. 원 없이 푸른 계절을 즐기고 있었다.


조명도, 꽃가루도, 꽃내음도 없는 곳은 내가 서 있는 가장자리뿐이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른 공간 같았다. 문지기는 그럴 거면 얼른 자리를 비켜주라는 눈치를 주기도 했다.


물론 나도 예전엔 마음만 먹으면 스테이지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내 가까운 곳에 계단에 있었고, 연애든, 우정이든, 일이든 그 외 어떤 명분으로든 나는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려웠다. 나는 늘 마지막 걸음을 앞두고 스테이지에서 물러났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너무 잘 알았고, 상처를 두려워하는 멍청이였다. 그렇게 스테이지 위의 사람들이 아픔과 실수를 겪으며 멋진 어른으로 자라나는 사이에 나는 그저 이도 저도 아닌 존재로 남은 것이다.


나는 나를 사랑해준 적 없었고, ‘예쁘네.’, ‘좋은 나이네.’라는 말을 들어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끝내 발도 디디지 못한 패배자였으니까. 아무도 소외시킨 적 없는데, 나 홀로 청춘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있지만, 모든 청춘이 빛나진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조금 조숙하게 깨달았다. 그게 내 청춘이 비극인 이유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이라는 상상을 종종 하지만 나는 내게 다시 20대가 주어져도 똑같은 20대를 보내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이 초라한 청춘의 결과물은 있었다. 빛나는 다른 청춘을 마음껏 구경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때론 나의 친구, 동료, 옛 썸남들을 보며 그들 나름대로 청춘을 소비하는 방법을 관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청춘은 용감하고, 찬란하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루며 인생의 절정을 즐긴다. 일종의 대리만족일지도 모른다. 남들도 그렇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의 글에선 꽃향기가 난다. 이것이 가장자리에서 흘려보낸 20대의 미미한 성과라면 그것만으로도 됐다.




비극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고 했던가. 그나마 다행인 건 나의 청춘이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당간당하긴 하지만 문지기의 눈치를 애써 피하고서 폐장까지 버텨볼 계획이다. 그럼 내 앞에도 언젠가 다시 계단이 놓일지 모르니까. 그땐 정말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스테이지로 올라가 볼 생각이다.


끝자락, 아주 찰나일지라도 동경하던 그곳에 발을 들일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빛나는 조명과 화려한 꽃가루와 풋풋한 꽃내음을 만끽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일까. 그 소감이 궁금해서 나도 버텨보기로 했다. 원래 끝까지 버티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별 볼 일 없는 청춘일지언정 다 지나고 나면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안다. 먼 훗날 주름이 생긴 내가 이 시절을 미화하며 무척 그리워할 것이란 것도 안다. 그러므로 미래의 나를 위해서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스테이지에 올라가 보는 것. 노년의 유일한 추억거리를 만들어주는 것.




앞서 말했듯이 모든 청춘이 빛나진 않는다. 때론 비교적 초라하거나 협소한 청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청춘은 누구나 공평하게 일생에 한 번씩은 주어진다. 나는 이게 이 시절만의 특권이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소중한 시기를 어떤 방식으로 보낼지는 가진 자의 몫.


그리하여 청춘은 멀리서 보면 대부분 희극, 가까이서 보면 이따금 비극이다.


당신의 청춘은 안녕하신가요?


후회 없이 보내고 계신가요?


당신은 당신의 스테이지를 마음껏 즐기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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