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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May 09. 2024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나의 인제(麟蹄), 나의 인제(Now) 1.

공립학교 교사가 한 학교에 5년 근무한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5년째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반드시 이동해야만 하는데 희망한 지역에 자리가 없을 경우 원치 않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보통은 5년이 되기 전에 옮긴다. 나도 인제에(그것도 한 학교에) 이렇게 5년이나 있을 줄은 몰랐다. 인제에 가면 빠르면 2년, 늦어도 3년이면 다시 원주로 올 줄 알았다.


내게 인제는 큰애 6학년 때부터 5년간 속초에 살 때 원주로 가는 길에 몇 번 들른 적 있는 동네였다. 군인용 깔깔이를 사서 좋다고 겨우내 집에서 입는 남편을 둔 덕에 원통 터미널 앞 군인용품점에 두 번(자기 입을 것 사러 한 번, 기름 아끼는 부모님을 위해 또 한 번) 들른 적이 있다. 원주 가는 길에 닭갈비 사 먹으려고 한 번, 간식 사려고 편의점에 두어 번 들른 적도 있다. 아이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인제 빙어 축제에 다녀간 적이 있고, 자작나무숲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 겨울에 다녀간 적도 있다. 나에게 인제는 그 정도였다. 지나가는 길에 들르는 곳 혹은 여행 삼아 당일로 다녀가는 곳 정도.


인제로 발령 났을 때 장학사에게 전화가 왔다(요즘은 발령 난 지역 안에서 학교를 배정할 때 교사들의 의견을 물어본다). 인제읍내에 있는 학교와 면 단위에 있는 학교가 있는데 어디를 원하냐고 했다. 면 단위의 학교는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와 병설학교였다. 남편과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면 서로(모두가) 불편할 것 같기도 하고 문화생활을 누리기에 읍내에 있는 학교가 낫겠다 싶어서 지금의 학교를 선택했다.


모든 게 새롭게 다가왔다. 상업 교사로 특성화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하다 진로 교사로 전과했기 때문에 중학교도 처음이었고 진로 과목도 처음이었다. 교직 경력 27년 차였지만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에게는 신규 발령과 같았다. 2020년, 코로나가 막 번지기 시작하던 때라 개학은 했지만 학생이 등교하지 않던 때였다.


관사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면 가는 거리였다. 시간을 재보니 차를 타고 가는 거나 걸어가는 거나 시간이 비슷하게 걸렸다. 겨울에 차에 쌓인 성에를 긁어내는 시간을 포함하면 걷는 게 오히려 더 빨랐다. 처음에는 인제 성당을 지나고 인제 향교 앞을 지나는 길을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며칠 다니다 보니 관사에서 나와서 기룡산 쪽으로 언덕길을 올라가는 선생님들이 보였다. 저기도 길이 있나 싶어서 따라가 봤다. 기룡산 아래 강화사라는 절의 마당을 가로질러 가니 비탈진 과수원을 지나 학교로 내려가는 좁은 길이 있었다. 세상에, 이런 길을 걸어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무 반갑고 기뻤다


출퇴근 길




새 학교, 새 업무, 새 과목, 새로운 사람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한 난생처음 해보는 재택근무와 원격수업까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도 3월은 언제나처럼 바빴다.


4월이 되자 마음의 여유가 좀 생겨났다. 도시락을 싸와서 함께 점심을 먹던 상담 선생님의 사무실 해가 잘 드는 곳에(내가 있는 곳은 북향에다 꼭대기 층이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해가 잘 들지 않는다) 화분을 만들어서 토마토와 고추, 상추를 심었다. 쌈 채소가 다 자라기도 전에 파티를 하고 싶어서 점심시간에 상담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 몇 분을 초대해서 고기파티도 했다(상담 선생님이 집에서 에어프라이어 들고 옴).

토마토와 상추/ 고기 파티(실제는 채소 파티)

4시 30분에 퇴근하면 4시 40분 전에 관사에 도착. 5시도 되기 전에 저녁을 먹고 나면 아무리 내가 초저녁잠이 많은 편이라 해도 주중의 저녁 시간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학교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학교와 관사를 둘러싼 인제의 산과 마을이 궁금해졌다.


발령 나기 전부터 인제의 배드민턴 클럽, 문화센터, 도서관, 체육센터, 걷기 코스 등을 인터넷으로 찾아봤었다. 인제에 있는 동안 이것저것 배우면서 재미있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사를 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가 배움의 욕구를 눌러버렸다. 그렇지만 걷기는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웠다.


저녁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길가의 야생화와 담장 없는 집의 꽃들과 집에 딸린 텃밭이 내 발걸음을 이끌었다. 목줄을 하고 바닥에 엎드린 채 봄햇살을 받으며 졸린 눈으로 붉은 장미를 바라보는 늙은 개의 모습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하늘과 가까운 산동네라 그런지 밤하늘의 달과 별이 유난히 가깝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개 짖는 소리와는 분명 다른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도 했다(나중에 유튜브 영상을 보고 노루 울음소리란 걸 알게 됨).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산책길에 인제 성당과 성당 앞에 만개한 철쭉을 보는데 '인제에서 지금 보는 이 풍경들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제에서 사진 배울 곳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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