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3코스 걷기
통통배들이 바다로 나가는 소리에 깨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43분이었다. 그때부터 또 잠이 오지 않아 해파랑길 3코스 맛집과 숙소에 대해 검색을 했다. 그러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자다 깨니 아침이었다. 이불을 안 덮고 자겠다더니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고 잘만 자더라고 k가 놀렸다. '고향집에 온 것 같이 편안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나 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런데 나와서 참 잘 먹고 잘 잔다, 잘 먹고 잘 자는 건 내가 일등인데 타이틀을 빼앗긴 것 같아' 그러자 '무슨 소리야 잠은 언니가 제일 잘 잤지' 하며 농담을 주고받는데 바다를 등지고 서있는 k 저 멀리 어두운 하늘에 붉은 띠가 길게 보였다. 어제 저녁 먹고 계산하면서 이곳에서 일출을 볼 수 있냐고 물었더니 산에 가려서 해가 바로 뜨는 건 볼 수 없다고 하여 기대도 안 했는데 아침놀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8시경에 숙소를 나왔다. 대변항 멸치털이 장면을 보고 싶었는데 제철이 아니라 볼 수 없었다. 대신 새벽에 바다로 나간 배들이 건져 올린 미역을 정리하는 모습을 봤다. 일하는 분들의 사진을 찍을 때는 뒷모습이라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얼른 한 컷만 찍고 지나갔다. 멸치광장을 지나 봉대산으로 꺾어지는 지점에서 할머니 두 분이 생선을 다듬고 계시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가서 '이게 혹시 멸치예요?' 하며 호들갑을 떨면서 여쭤봤더니, '이건 횟거리, 이건 구이 하는 거, 이건 젓갈 담그는 거' 하면서 가르쳐 주셨다. 갈길이 멀기도 하고 어르신들이 일하시는데 계속 보고 서서 말 붙이는 것도 실례다 싶어 잠시 보다가 봉대산 쪽으로 올라갔다.
봉대산은 경사가 완만해서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정도의 산이었다. 평일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산을 내려갈 때 올라오는 사람 딱 한 명을 보았다. 멧돼지를 만나든 사람을 만나든 이 길을 혼자 걸으면 좀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내려와 기장군청을 지나 기장체육관 앞에서 간식을 먹으며 쉴 때 갑자기 k가 '저기 우리처럼 걷는 사람 있다'하더니 얼른 따라가자고 했다.
3일 만에 큰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다. 빨간 리본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거나, 두루누비앱을 켜서 핸드폰을 보면서 따라 걷거나,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오기도 하는 우리 모습과는 달리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분은 뒷모습만 봐도 걷기의 달인 같은 포스가 느껴졌다. 그분을 따라 걸으니 걷는 속도가 조금 붙었다. 일광해변 쪽으로 가다 보니 낚시꾼 차림의 남자 대여섯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이 그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또 리본을 놓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사이 우리 앞에 가던 그 걷기의 달인을 놓쳐버렸다. 일광해변 어느 지점에서는 알 박기 텐트들이 즐비한 기이한 풍경도 봤다.
1시쯤 동백항에 도착했다. 새벽에 검색해서 점찍어둔 아라&진 식당에 가서 성게미역국과 성게비빔밥을 시켰다. 밑반찬까지 깨끗하게 다 먹고 조금 쉬다 다시 걸었다. 일기예보에 오후에 비가 온다는 표시가 되어있어서 비 오기 전에 코스를 마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칠암항을 지날 때는 길가 빈터에 가오리와 붕장어를 말리고 있는 곳이 많이 보였다.
중간에 힘들어서 멈출 수도 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하니 첫날부터 숙소는 목적지 가까이 갔을 때 잡기로 했다. 임랑해수욕장이 보이는 지점에서 숙소 예약을 위해 잠시 쉬었다. 새벽에 검색해 놓은 민박집에 먼저 전화를 했더니 9만 원이라고 했다. 이틀 모두 숙박비로 6만 원을 지출한 우리로서는 아무리 주변에 잘 만한 곳이 없다 해도 너무 비싸다는 생각에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으니 좀 전 그분이 그럼 8만 원에 해줄 테니 오라고 했다. 거절하고 다시 인터넷을 뒤졌다. k가 민박 말고 펜션으로 알아보자며 전화한 하얀 고래 펜션이라는 곳에서 5만 원이라고 하길래 그곳으로 결정했다.
다시 걸었다. 가자마자 따뜻한 방에 누워서 푹 지져야지 생각하니 좀 더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임랑해수욕장 도착할 즈음에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임랑 해수욕장은 아주 작고 조용한 곳이었다. 맨발 걷기 하는 몇 사람과 엠티를 온듯한 젊은 학생들이 보였다. 해변 왼쪽 끝에 해수욕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는데 검색해 보니 그곳이 고리원자력 발전소였다.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찾아갔으나 우리가 찾는 펜션이 없어서 조금 헤맸다. 마침 바로 옆 부동산 사무실에서 젊은 남자이 나오길래 물어서 펜션을 찾아갔다.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2시 30분쯤이었다.
마당에서 문을 열면 바로 방이었다. 몸만 나란히 눕힌다면 네 명은 빼곡하게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그마저도 감사했다. 임랑해수욕장의 민박이 싫으면 택시를 타고 나가서 자고 다음날 다시 이곳으로 와야 했는데 그럴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작은 방이었지만 이층에 다락방도 있었다. 전기로 난방을 하는 방이어서 온도를 올려놓고 바로 누웠다. k가 수건과 전기주전자도 받아다 놓으며 이리저리 정리하고 씻는 사이 나는 그대로 꼬꾸라져서 깜빡 잠들었다.
5시쯤에 펜션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하얀집이라는 식당으로 가서 한정식을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불 켜진 술집에 들어갔으나 영업이 끝났다고 했다. (오해하실까 봐, 우린 이틀 동안 저녁 먹을 때 맥주 한 병을 둘이 나눠 마신 게 다인 사람들임) 6시 30분에 영업이 끝나는 동네. 나는 이런 동네가 마음에 든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편의점에 가서 막걸리 한 병과 안주 거리를 샀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먹을까 생각했는데 k가 펜션 사장님이 한 건물에서 운영하는 국숫집에 들어가서 먹자고 했다. 들어가니 사장님 부부가 식사를 막 마치고 있었다. 남자 사장님께서 셋이서 수다 떨라며 자리를 비켜주셨다. 혼자 길 건너편 편의점에 가서 사장님은 어떤 술을 좋아하실까 고민하다 알밤 동동이라 적힌 막걸리 한 병과 안주거리를 몇 개 더 사 왔다. 알밤 동동 막걸리를 보더니 여자 사장님께서 '부산은 생탁인데~"라고 했다. k가 다시 가서 생탁으로 바꿔왔다. 여자 사장님께서 갈비찜과 김치를 안주로 내오셨다.
원자력 발전소 가까이 살면 무섭지 않냐, 하기야 나도 북한이 미사일 쏘면 친정 식구들이 괜찮냐고 전화 온다, 어쩌다 이곳에 살게 되셨나, 어디서 왔냐, 두 사람은 어떤 관계냐, 등산 다녀오냐, 가게는 직접 꾸미신 거냐, 해수욕장이 조용해서 여름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 여름 석 달 벌어서 일 년 먹고 산다... 등등의 유쾌한 수다가 이어졌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여자 사장님께서 사진 찍으라고 포즈도 잡아주시고 다리 아픈데 바르라면서 맨소래담 로션도 빌려 주셨다.
파도가 바로 방문 앞까지 들이치는 듯 큰 소리로 철썩거렸지만 막걸리 덕분에 금방 잠들 수 있었다. 물론 파도 소리에 몇 번이나 깼지만.
트랭글 기록 : 20km, 13시간 2분(저녁 먹고 온 시간까지 포함), 824kcal
걸음 수 : 33,511보
날씨 : 흐림(3도~12도)
걸은 날 : 2023년 1월 17일
[해파랑길에서 만난 디카시]
어부는 바다한테서 멸치를 털었고
나는 멸치를 손질하는
어르신들의 삶을 조금 털었다
바다가 어부들을 봐줬듯이
어르신들도 이 정도는 봐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