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고 쓰고

대변의 별이 빛나는 밤에

해파랑길 2코스 걷기

by 당근

밤새 잠을 자다 깨다 하며 선잠을 잤다.

빨래를 스타일러 안에 걸어두고 말렸더니 스타일러에서 습기가 배출되는지 공기가 습해서 몇 번이나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온몸이 쑤시는 느낌에 몸에 열이 나서 더 답답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는 k가 깰까 봐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숨이 막혀서 어쩔 수 없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8시 30분에 숙소를 나왔다.


해운대의 삼포라 불리는 미포, 청사포, 구덕포를 거쳐 송정해변과 해동용궁사를 지나 대변항에 이르는 코스. 길이 14km, 소요시간 5시간, 난이도 쉬움


두루누비에 나온 해파랑길 2코스 설명이다.

미포, 청사포, 구덕포, 해동용궁사, 대변항. 모두 낯선 단어들이었다. 해운대 해수욕장 끝에 미포역이 있었다. 시작부터 산을 오르는 해파랑길 1코스에 비해 미포에서부터 철길을 따라 걷는 2코스의 시작은 무난했다. 철길 위 공중에 철로가 설치되어 있고 한 칸짜리 장난감 같은 기차들이 이른 시간이라 손님을 태우지 않은 채 이동하고 있었다. (나중에 해운대 블루라인파크 스카이캡슐이라는 이름의 관광 상품이라는 걸 알게 됨) 한 칸짜리 장난감 같은 기차 뒤로 엘시티 건물이 보였다. 번쩍이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지만 한 발 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엘시티 건물과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바다로 걸어가는 여행자 같은 꼬마 기차가 대비를 이루는 아이러니한 장면이었다.





철길을 따라 난 길을 걷다 어느 지점에서 철길을 가로질러 언덕배기로 올라가다 보니 문텐로드로 가게 되었다. 문텐로드라니. 표지판을 읽어보니 선탠처럼 달빛을 받는다는 뜻이라고 되어있었다. 달맞이길, 달빛길 같은 이쁜 말을 두고 왜 굳이 문텐로드라 했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름이 조금 아쉬웠지만 문텐로드는 낮에도 이렇게 좋은데 밤에 달빛을 받으며 걸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걷다 보니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끊어진 철길처럼 보였는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쳐다보니 사람들을 태운 관광열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해안을 따라서 관광열차가 다니고 그 철길 위 공중으로 또 장난감 같은 꼬마 기차가 다니는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하며 어제보다는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청사포를 지나가다 10시쯤 철길 옆 바닷가에 있는 한 카페에 들어갔다. 어디를 갈까 검색을 하거나 가까운 몇 개 카페를 두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냥 다리가 아플 때쯤 눈에 띄었기 들어간 카페였다. 들어가니 육칠십대로 보이는 남자 어른 2명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한 분이 일어나더니 아메리카노를 시킨다면 자기가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다른 메뉴는 주인이 나올 때까지 좀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우린 둘 다 커피를 안(못) 먹는다. 기다리기로 했다. 손님이 와서 기다린다는 전화를 받고 20분쯤 지나 나타난 주인은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 남자 어른의 딸인 듯했다. 감귤차 2잔을 시켜서 해 잘 드는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30분쯤 쉬다 나왔다.



카페 가까운 곳 청사포 다릿돌 전망대가 있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신발 위에 긁힘 방지 덧신을 신고 바다 위로 난 전망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갈 거냐고 물었더니 k는 안 가겠다고 했다. 나도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바닥이 유리로 된 높은 곳을 걸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패스. 오른쪽에는 바다를 끼고 왼쪽에는 철길을 낀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송정 바닷가에 도착했다. 등대 주변에 정박된 작은 배들과 해를 등지고 앉아서 밧줄을 손질하는 부부(앉아서 일하는 모습만 봤는데도 일하는 모습마저 닮아 있어서 누가 봐도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송정 해수욕장을 지나 죽도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죽도 공원은 대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의 섬인데 소나무가 더 많았다.


죽도공원을 돌고 나와서 차도 쪽으로 따라 걸을 때 도로변에 세워진 과일차가 눈에 띄었다. 거기서 천혜향을 만 원어치 사서 k가 배낭에 넣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뭔가를 사면 계속 k가 들고 다녔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걷다 보니 곳곳에 미역이 널려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빨랫줄에 걸려서 넓은 판에 뉘어져서 미역들이 햇빛을 받으며 잘 말라가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점심때가 되기도 했지만 미역을 보니 흰밥에 미역국이 먹고 싶어졌다.




지도앱을 켜서 근처의 식당을 검색하니 해파랑길을 벗어난 큰 도로변 쪽에 식당이 있었다. 좁은 동네길을 따라 걸어서 식당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곰장어집이 모인 식당가였는데 곰장어는 둘 다 좋아하지 않아서 간단하게 생선조림이나 먹자하며 갈치조림 간판을 보고 한 식당에 들어갔다. 자리를 안내받고 앉으면서 옆 테이블을 힐끔 보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간단한 갈치조림이 아니었다. 가방을 벗어놓고 화장실을 가려던 k와 메뉴판을 펼쳐보던 나는 메뉴판 가격을 보고는 다시 나와야만 했다. 간단한 점심 한 끼로는 너무 과한 상차림과 가격이었다. 물과 메뉴판까지 받았지만 죄송하다고 말하고 다시 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도로 건너편에 부엌우동집이라고 붙은 간판이 보여서 검색해 보니 나쁘지 않아 보여서 그 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이라 입구에서 조금 기다렸다. 11,500원에 유부초밥, 꼬마김밥, 튀김, 요구르트까지 나오는 가락국수 정식집이었다. 김치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었다. 알고 보니 부엌우동집 본점이었다. 만족스러웠다.


점심을 먹은 후 1시경부터 다시 바닷가 길로 돌아와 빨간 리본을 따라 50분쯤 걷다 보니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라는 해동용궁사에 도착했다. k는 한번 와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처음 와본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외국 관광객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많아 보였다. 절로 향하는 좁은 길에서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중국의 어느 관광지에 온듯한 느낌도 들었다. 황금나뭇잎에 소원을 적어 줄에 걸어놓은 것들이 많이 보였다. 펜과 나뭇잎을 준비해 놓은 곳이 보여서 '이거 나도 적어서 걸어 놓을까', 했더니 k가 '그거 돈 내고 하는 거야'라고 해서 뻗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변명 같지만 사실은 절과 소원과 황금잎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내 생각하던 참이었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겹겹이 쌓인 황금 소원잎들에게서 벗어나서 사람 없는 곳을 걸으니 또 좋았다. 가다가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누워서 쉬며 간식도 먹고 천혜향도 먹었다. 다시 일어나 걷다 보니 오시리아 산책로라는 곳에 도착했다. k가 '언니, 저기 봐'해서 왼쪽을 바라보니 큰 건물이 있고 그 앞 야외 수영장에서 바다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유로워 보였다. 따뜻한 물에서 수영하며 바다를 바라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걸었다. 글을 쓰는 지금 그곳의 이름이 알고 싶어서 검색어로 '용궁사 근처 콘도' 해도 나오지 않아서 '용궁사 근처 야외수영장'이라고 검색하다 아난티앳 부산코브로 이름을 바꾼 힐튼 호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랑대를 거쳐 대변항에 4시쯤 도착했다. 할머니들이 해산물을 파는 곳을 지나서 가는데 해산물들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걸을 때마다 자꾸 물건을 사라고 부르는 바람에 미안한 마음에 먼 곳으로 가서 걸었다. 앱을 켜보니 그곳에 묵을만한 숙소가 모여있긴 했으나 좀 더 걷기로 했다. 해파랑길 2코스 스탬프를 찍고도 조금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대변항 멸치광장까지 갔다. 그곳에서 쉬면서 조금 더 가면 숙소가 있는가 찾아보니 아예 없었다. 다시 스탬프 찍었던 곳으로 500m 정도를 되돌아 걸어가야 했다. 그때 알았다. 지쳐서 이제는 정말 그만 걷고 싶다 싶을 때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만 하는, 그 길이 해파랑길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구간이라는 것을.





2코스 종점까지 다시 갔다. 할머니들이 해산물 팔던 곳까지 가면 좀 더 깔끔한 숙소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k가 거기까지 가자고 했다면 제발 그러지 말자고 사정했을지도 몰랐다. 바로 앞에 보이는 전 객실 바다뷰를 자랑하는 아주 근사한 이름의 모텔로 들어갔다.


그곳은 왕들이 사는 곳을 뜻하는 단어가 포함된 이름이 무색하게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담배 냄새가 났다. 프런트라고 하기엔 너무한, 안에 있는 사람 얼굴도 보이지 않고 반달 모양의 작은 구멍으로 카드와 키만 서로 주고받는 곳에 도착했다. 카드를 건네며 '담배 냄새 안나는 방으로 주세요' 했더니 '요즘 누가 담배 피워요, 담배 냄새 안 나요'하는 나이 지긋한 여자 어른의 목소리와 함께 키가 내손으로 건네졌다.


방문을 열자마자 바다가 보였다. 아니다. 바다를 보려는데 둥근 테이블 위에 떡 하니 놓인 재떨이가 먼저 보였다. 아주 오래된 모텔이었다. 창문을 열고 침대 위의 패드와 분홍색 이불의 먼지를 털어냈다. 내가 아무리 추워도 저 이불을 덮지 말아야지, 차라리 오늘 종일 입은 패딩을 덮고 자야지 다짐했다.


짐을 정리해 두고 숙소 가까운 횟집에 가서 멸치쌈밥과 멸치구이를 먹었다. 멸치가 그렇게 속살이 희고 큰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편의점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것들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k는 나한테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냐고(깔끔하지 않아 보이는 욕조에서 라는 뜻을 담아) 물었지만 나는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서 몸을 푹 담갔다.



담배 냄새나는 방, 깨끗해 보이지 않는 낡은 침구. 그러나 그곳에서 k와 나는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떠올리며 맞장구를 칠 만큼 대변항 불빛과 밤바다가 그려낸 풍경은 별 5개를 줘도 아깝지 않았다.



점심(좌) / 저녁(우)


트랭글 기록 : 18.5km, 8시간 2분, 805kcal

걸음 수 : 32,445보

날씨 : 맑음(-1도~10도)

걸은 날 : 2023년 1월 16일



[해파랑길에서 만난 디카시]


길 위의 독서

다소 투박하고 거칠지만

행간이 넓은

잘 말린 문장이다


천천히 곱씹으면

삶의 내음이 온몸에 스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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