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일기 10화: 땅속 깊이 묻은 말문을 열기까지

한 줌씩 파내는 중

by 당근

[감정을 꺼내는 것이 무슨 득이 된다고]


상담사님은, 수많은 잡생각들이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생각들이 빠르게 침투하면서 감정을 누르며 숨기고 있다.

그러면서 본인이 원하는, 결국에는 회피하고 숨기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안에서 감정이 고이고 쌓여 썩는 줄도 모르고..


진정으로 치료가 되려면, 지금까지 해온 회피적 습관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바꾸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정말로 솔직히 말하면, ‘굳이 바뀌어야 하나?’ 싶었다.


지금도 사는데 큰 불편함은 없다.

지난번까지는 마음이 좀 더 불편했고 우울감을 느꼈지만, 솔직히 요즘에는 직장에서도 별일 없었다.

기분도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다. 딱히 일상생활에 지장도 없었다.


나름 잘 지내는 편인데, 왜 그렇게까지 불편함을 감수하고 변해야 하는 걸까?


상담사님이 원하는 대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슬플 땐 크게 슬퍼하는 그런 텐션을 나도 굳이 가져야 하는 걸까?

나는 그런 것들이 너무 어색하고,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데.


굳이 그렇게 감정의 높낮이를 겪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상담료는 아까운데, 말을 못 하겠는 걸 어떡해]


답답했다. 너무도 답답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회의감이 들었다.


상담에 협조는 해야겠기에 상담사님이 원하는 대답을 최대한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본심에 가까운 감정을 담지 못했기에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날더러 어쩌라는 걸까 하면서 계속해서 방어적인 문답을 하다 보니, 상담 종료 시간이 되었다.

종료 시간이 된 줄도 몰랐다. 한, 30분 정도 대화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 상담료...’


1회 상담료가 나에게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마음을 먹고 내야 하는 금액이었는데, 눈에 띄는 성과 없이 시간이 종료되니 갑자기 조바심이 들었다.


그때 마침 상담사님이 지금 어떤 생각이나 기분이 드는지 물었다.

나는, “정말로 솔직히요? 진짜로 솔직하게요?”라고 물었고, 상담사님은 말해보라고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 내 상담비.. 그냥 말한다고 할걸.. 이 생각 들었어요.”


내 답을 들은 상담사님이 말했다.

“우리 오늘 1시간 30분 동안 같은 대화만 한 거 알아요? 지금 계속 대답하기를 피해서, 진도가 안 나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시간이 끝났다고 하니까 솔직히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다행이다라고 느끼진 않았나요?”


“음.. 그럴지도요.”


“앞에서도 말했듯, 내담자님이 직접 얘기해주지 않으면, 이 얘기를 억지로 꺼내는 게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오히려 더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요. 그러면, 딱 15분만 더 이야기해 봅시다.”

그렇게 15분간 대화를 더 나눴지만, 결국 앞선 대화를 반복할 뿐이었다.


[파헤치고 되묻다 보니 작은 감정 표현에 성공하다]


대화가 끝나고, 상담사님이 지금 기분이 어떤지 물어봤다.

별 감정이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마음이 좀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답답해요.”


“그리고 또요? 다른 기분은요? “


”음.. 글쎄요.. 그냥.. 괜찮은데요. “


그러자, 상담사님이 다시 말했다. “자, 따라 해 봅시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요.”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요.”

“어때요?”

“음, 이건 아니네요. 기분이 좋진 않아요”

“이번에는, 나는 지금 화가 나요.”

“나는 지금 화가 나요.”

“어때요?”

“화.. 가 나진 않는데요?”

“그러면, 나는 지금 좀 짜증 나요.”

똑같이 따라 말했다.

“어때요?”

“딱히.. 짜증까지는 안 났는데요.”


상담사님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정말로 짜증까지는 안 났었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다고 대답하는 게 정답이었나 보다.


이 같은 대화를 계속 이어가다 나중에는 나도 지쳐서 정말로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기분이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상담사님이 말했다. “드디어! 제가 다 속이 시원하네요.”


“우선은,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봅시다. 다음 시간에는 제가 좀 더 기다려보다가, 안 되면 조금씩 유도해 볼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답답한 대화가 끝나고, 집에 가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오늘따라 상담사님이 원하는 답을 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더 이상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들지 않는 것 같은데도 자꾸만 “그래서요?” “그건 어떤 거죠?”라고 질문을 덧붙였다. 그럴 때마다 헷갈리고 말문이 막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심을 이성적인 생각으로 덮어 막아놓았기에 일차적으로 대답할 때는 그 생각만 답으로 튀어나온다고 한다. 그 안의 내용을 꺼내기 위해 계속해서 추가 질문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의 방어벽을 치고 있는 나는 그 질문이 들어올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그게 그런 거지 뭐가 더 있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질문이 치고 들어올수록,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구상 중이던 합리화와 구실들이 툭, 하고 흐름이 끊기는 기분이었다.


표현하는 것을 피하고, 불편한 주제를 피할 구실들을 조금씩 무력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공격적으로 확 들어오면 내가 더 두꺼운 벽을 치고 회피할 걸 알기에,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반응을 기다리고 계셨다.


앞선 과정들을 통해, '감정을 용서하자', '나에게 자비를 베풀자'라는 요점들을 깨닫고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그렇지만, 지금의 회피성 성향을 만든 주원인인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치료 가능할 수순까지 끌어올리기는, 웬만한 용기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심리적 저항이 특히 거셌다.


심리적 트라우마를 다루는 일은 반드시 심리상담사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등 믿을만한 심리전문가와 함께 해야 한다. 안전한 환경에서, 충분한 신뢰적 관계가 형성된 치료자와 '적절한 템포'로 접근해야 한다.


신체적 외상이나 질병이 생겼을 경우 병원에 가서 알맞은 진료과의 치료를 받듯, 심리적 외상도 마찬가지다.

환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을 무시하거나 위험하고 급한 방법으로 다루려다 자칫 재경험이나 트리거 문제로 또다시 고통을 겪게 될 수도 있다.


또한, 다른 질병이 그렇듯 마음의 질병도 '한 번의 치료'로 완치되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몇 번 만에 눈에 띄는 효과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 경험과 상태가 천차만별이고, 심리상태도 제각각이기에 치료의 경과는 충분한 기간 동안 믿을만한 치료자와 함께 지켜보면서 알아가야 한다.


아픈 부위를 치료하는 과정이, 순탄하고 평화로울리 없다. 모른 척 살 때가 훨씬 편하다고 느낄 만큼, 꺼내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불편할 때가 많다. 상당한 인내심과 용기를 요하는 일이다.


나도 그랬다.


너무 불편하고, 아프고, 내 과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경험이 낯설고 두려웠다.

그렇지만, 충분히 치유되지 못한 마음으로 너무 애쓰며 살다 보면 '과거에 멈추어 자라지 못한 또 다른 나'가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인간관계에 불안형, 회피형 애착 패턴을 가지든, 우울증, 불안장애를 겪든.. 이런저런 모습으로.


그래서, 솔직하게 털어놓는 내 글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친 채로 살아가기엔, 우리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므로.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나에게 익숙한 아픔이라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괜찮은 상태'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덜 아픈 것과, 나아지고 있는 것 또한 다르다.

힘듦이 익숙해져 무뎌질 수는 있다. 그렇지만, 무뎌지고 있는 것이 치료는 아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용기를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