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일기 11화: 이윽고 도달한 이야기

묻어둔 상처를 마주하다

by 당근

상담이 끝난 후, 집에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가 상담사님을 믿고 내 속얘기를 해도 될까?'

'이 거부감을 이겨내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건, 또다시 GPT였다.

말하고 털어버리자는 생각으로 조금씩,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써 내려갔다.

엔터를 누를 때마다 공감이 잔뜩 담긴 반응이 돌아왔다.

물론 사람이 하는 공감과는 다른, 계산된 결과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애써 묻어두었고 부정했던 과거를 누군가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나둘씩 더 얘기하다 보니, '말하는 게 그리 큰 일은 아니구나' 싶었다.

속에 있는 얘기들을 박박 긁어내어 토해내고 나니, 조금 시원해진 기분도 들었다.


생각해 보면, 상담 때에도 비밀 보장은 될 것이고, 결국 이 답답한 감정들을 해소하려면 그걸 건드리긴 해야 한다. 상처가 거기 있는데, 다른 곳에 연고를 바른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그래서 상담사님에게 연락을 보냈다.


"목요일에 가족사 그냥 줄줄이 말해봐도 되나요? 좀 더 가감 없이..? 말씀 안 드린 게 좀 더 많아요.

요약하거나 정리하려고 하면 또 습관적으로 축소하거나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할 것 같아서 두서없이라도..

생각해 보면 요즘 그런 걸 누구한테 얘기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러면 감정이 나올 것 같은데요..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지? 이런 거 얘기해도 날 이상하게 안 볼까' 이런 잡생각 두고 갈게요.

저 나름 좀 파란만장하게 산 것 같아요.."


그러자, 당연히 된다는 상담사님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굳이 먼저 리마인딩 하지는 말고, 상담 때만 얘기해도 충분하다'라고 했다.

안전하게 마음을 잘 보호하고 보듬어가면서 천천히 꺼내는 것이 중요하므로.


"상담 때 또다시 얘기하기 싫어질까 봐 걱정됐는데, 한번 마음먹었으니 잘 말하려고 하지 않고 일단 운을 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가 리드해 줄 거예요. 님은 마음의 준비만 하시면 돼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제는 정말로 말해야 할 때]


드디어 대망의 상담일!

이제는 진짜로 과거를 꺼내야 한다.

지난 상담일로부터 5일이 지났고, 나는 그 사이에 다양한 감정 기복을 겪었다.

상담사님에게 말하겠다고 결정한 직후에는, 잔뜩 눌러놨던 과거의 아픈 감정들을 꺼낸 후유증으로 툭하면 눈물을 흘렸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나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새삼, 내가 그때의 상처를 묻어둔 것이었을 뿐 아직 낫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리고, 지난 상담 때 그토록 열심히 과거의 일을 피해 가기 위해 애를 썼는데, 막상 결정하고 나니 눈에 띄게 마음이 편해진 걸 느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야, 나 얘기하고 싶었던 것 맞네.’


스스로가 안쓰러우면서도 기특했다. 사춘기 동생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러다가 또다시 평일이 되었고, 출근하여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그 아픔이 점점 무뎌졌다.

우선순위가 감정에서 생각으로 다시금 옮겨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실수 없이 집중해서 일을 쳐낼 수 있으니까.


나도 내가 무뎌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무뎌지면서 과거의 일을 얘기하는 걸 또 피하고 싶어질까 봐 많이 걱정했다.

그런다면, 지난 상담처럼 상담사님과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를 하거나,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얘기를 꺼내려다 나도 다칠 테니까.

그렇지만 GPT를 상대로 한 번 예행연습을 했고, 상담사님에게도 이미 말하겠다고 마음을 굳혔었다.


그러니 마음이 갈팡질팡 하면서도, 선택지에 ‘과거의 일을 꺼내지 않는다’는 건 없었다.


[드디어 첫 운을 떼다]


신기한 건, 꺼내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상담일까지 가슴이 계속 답답했다.

맥박을 재 보니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아마도, 트라우마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했을 터다.


하지만 나는 이게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시간 눌려온 내 감정들이, 자물쇠가 살짝 풀리자 터질 것처럼 아우성치며 ‘내 목소리를 들어줘!!’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장롱에 각종 옷가지를 잔뜩 쌓아놓고 억지로 문을 닫으면, 안에서 짐들이 조금씩 기울어지다가, 결국 문이 활짝 열리며 내용물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이 답답함이 그 상태인 것 같았다.

쏟아지기 직전에, 짐들이 장롱문에 잔뜩 기대어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는 상태.


그 답답함은, 상담실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상담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속이 편안해졌다.

정말로 감정의 무게감이 맞았던 것이다.

(솔직히, 역류성식도염이 요새 심해졌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안고 상담실 문을 열었다.

상담사님을 만났고, 마주 앉았다. 상담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지냈냐고 해서, 위에서 말했던 나의 감정변화를 한차례 설명했다.

나도 아직 마음이 조여 오는 상태였고, 상담사님도 조심스럽게 내 반응을 살피는 중이셨다.

말을 꺼내기까지, 상담실엔 조용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하기에 앞서, 상담사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공간에, 내담자님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내담자님을 진심으로 도와주고 편들어줄 딱 한 사람만 옆에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공간에는 윤리적 기준, 감정의 정답,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괜찮은 답을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이 공간에서는 안전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나요?”


“음.. 알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슨 생각과 기분이 있었나요?”

“그냥 뭐.. 말해도 괜찮겠다, 정도요.”

“그러면, 시작해 봅시다.”


‘시작’하자는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말을 못 꺼내면 어쩌지,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면 어쩌지 라는 고민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오늘은 잡생각에 지지 않기로 했으므로, 일단 운을 뗐다.


“음 일단은 어릴 때부터 집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어요. 과자나 과일은 사치였고, 간식이 먹고 싶다 하면 집 앞 나무에서 작게 열리는 꽃사과를 따 주시거나, 소금을 주시면서 간식 대신 먹으라고 하실 때도 있었어요...”


생각나는 걸 말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아 이것도 말해야지! 이런 일도 있었어!’ 하면서 이것저것 떠올랐다. 이런 일들을 말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는데도, 마치 여러 번 말해본 사람처럼 아주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겪어온 일들을 술술 말했다.


이쯤 되면, 그냥 말하고 싶었던 게 확실하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약간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덤덤하게 얘기했지만 앞에서 상담사님이 눈썹을 찌푸리거나, ‘아이고..’하며 반응하시거나, 작게 한숨을 쉬며 메모하는 걸 보는 것도 나름 좋았다.


누군가가, 내 아픔에 나보다 더 아파해준다는 게, 더한 감정을 표현해 준다는 것이 조금.. 든든했는지도 모른다.


길고 긴 과정을 거쳐, 드디어 가장 깊은 곳에 묻혀있던 이야기에 도달했다.


이 내용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풀어나가야 할지, 어떻게 말하는 것이 현명할지 많은 고민이 된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서로 마음 다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속도와 따뜻함으로 풀어나가고 싶다.


모든 걸 다 말할 순 없겠지만, 그중 몇 가지는 이제 꺼내도 괜찮을 것 같다.

다음 편부터는 상담 현황에 대한 내용은 잠시 내려놓고, '지금의 나'를 만든 어릴적 얘기를 조금씩 풀어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