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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Mar 05. 2024

신앙과 신학은 다른 걸까?

신앙과 신학에 대해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에 대하여

Intro

한국 교회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신앙과 신학이 다르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고, 신앙과 신학이 같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자.


하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신앙과 신학을 구분하는 사람들은 진보 진영에 속해 있고, 신앙과 신학을 같다고 보는 사람들은 보수 진영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신앙과 신학이 다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신앙과 신학이 다르다고 하는 사람들

먼저, 신앙과 신학이 다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은, 교회의 믿음과 학문의 믿음이 다르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교회의 믿음이 맞고, 학문으로는 학문의 믿음이 맞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학문적으로는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믿어도, 교회에 가서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다. 갑자기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는데, 진짜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저런 주장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교회에서는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지만, 학문적으로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편협하고 무지몽매한 보통의 기독교인들과 달리 자기는 뭔가 깨어있고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학문하는 사람이라 이거다. (진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신앙과 신학을 구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신앙과 신학을 구분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믿고, 교회에 가서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설교할 수 있을까?


내가 위에 올린 링크들을 보면 실제로 저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링크를 보았다면, 심지어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지만 교회에서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 것이다. (물론 보수 교단에는 그런 목사는 치리감이다. 애초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으면 신학교에 올 일도 없다.) 이 사람들이 바로 신앙과 신학을 구분하는 사람들이다.


신앙과 신학을 구분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학문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지만 교회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설교하는 모습을 윤리적으로 문제시하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생각을 들여다보면,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아도, 교회에서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설교해도 되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공식적으로 믿음을 둘로 나눠서 신학적으로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지만, 신앙적으로 예수는 부활했다는 주장까지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걸 이해 못하는 사람을 무식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숨을 안 쉬면 죽는다는 믿음

그런데 아래의 비유를 들어보면 이게 얼마나 웃기는 소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주장을 과학으로 가져가 보자. 실제적으로는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고 믿되, 학문적으로는 숨을 쉬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소리가 가능한 거다!


사람을 숨을 안 쉬면 죽는다는 믿음과, 학문적으로는 사람이 숨을 안 쉬어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이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 바로 신앙과 신학을 구분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사람은 밥(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실제적인 믿음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학문적인 믿음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 사람들에게는 그게 가능하다.


(뭐, 링겔을 맞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면 먹지 않아도 생존할 수는 있을 거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논의를 파악하지 못한 거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은 결론적으로 인간은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죽는다 의미이다.)


이 사람들 중 상당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믿는다.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데, 그냥 믿음으로 믿는 거라는 인식에 가깝게 보인다.


그런데 왜 신학을 하는 걸까? 예수가 부활한 것을 못 믿겠으면 안 믿으면 될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주장을 하면서, "이걸 이해 못하다니. 무지몽매한 인간들"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




엘리트주의에 빠진 사람들

나는 저 사람들이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저 사람들의 자세가 매우 고약해 보인다.


저 사람들은 과거의 (아마 현재도) 가톨릭과 같이 사람을 둘로 나눈다. 가톨릭에서는 성직자와 성도로 나누었는데, 저 사람들은 학문하는 사람과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나눈다. 즉, 과거의 가톨릭과 같이 엘리트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역사를 좀만 들여다보자. 종교개혁으로 신교가 빠져나간 이후 과거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하였다. 한쪽의 주장은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어려운, 그리고 고상한 성경을 보여줄 수 있느냐며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반대했다. 다른 한쪽의 주장은 성경은 우리가 매일 읽고 접해야 하는 건데 당연히 모국어로 번역해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19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을 때까지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개인 성경 공부는 지양되었고, 예배는 라틴어로 이루어졌으며, 성경 번역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개인 경건을 위한 성경 읽기가 다시 제안되고, 성경은 모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예배 도한 (드디어) 모국어로 드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불어 리더십에서 완전히 배제되던 평신도가 가톨릭의 리더십에 참여하는 기회도 주어지기 시작했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루터를 따라하는 거냐는 조롱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뭐,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성경 번역, 자국어 예배, 만인 제사장설이니 그런 소리가 나온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아무튼, 평신도는 무지몽매하며, 자국어 예배도, 자국어 성경도 허락할 수 없었다는 엘리트주의에 반대하여 시작된 게 바로 종교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무지몽매한 교회의 신앙똑똑한 엘리트의 신학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러니 어찌 과거의 가톨릭으로 회귀한 게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니 신학은 필요 없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된다.




신학은 필요없다?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신학 무용론

자유주의 진영의 교회들 사이에서 신학 무용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뭐,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고, 성경에 나와 있는 기적들은 죄다 뻥이라는 진보 신학자들의 주장이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상황이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이기는 했다.


사실 신앙과 신학을 구분하게 된 것도 여기서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떻게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학교에서만 하라는 교회의 몸부림 말이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신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순간 허수아비 논법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교단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은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다른 건전한 교단의 신학교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웃기지 않은가. 자유주의 교단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이상한) 신학으로부터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신앙과 신학을 분리했는데, 신학교의 학생들은 신앙을 곧이곧대로 믿는 성도들을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는 것이 말이다. (뭐, 칼 바르트도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이런 교육을 받았다가, 실제 목회를 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에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주의 신학계에 폭탄을 터트렸다.)


무지한 성도들의 신학 무용론

그리고 무지한 성도들 중에도 신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신학은 쓰잘데기 없으며, 성경만 있으면 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어이가 없는 주장인지 알 수 있다.


아래의 링크에도 나오지만, 예배만 해도 예배학이 존재한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모든 사람에게는 예배학이 존재한다.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올바른 예배인가 또는 더 나은 예배인가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정할 때에도 그걸 바탕으로 찬양이 은혜로운 교회를 찾거나, 교리를 잘 가르치는 교회를 찾거나,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빼먹는 교회를 피하거나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좀더 강력한 주장을 해보자. 성경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며 신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그 주장 또한 신학이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또한 신학이다. 잘못된 신학도 존재하지만, 신학이 필요없다고 하고 싶다면 주장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주장조차 그 사람의 신학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링크를 보면 저런 사람들에 대한 어거스틴의 반론이 나온다.)





결론

신앙과 신학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주장이 나온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질문이다. (왜냐면 신학과 신앙을 분리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신앙은 그렇게 믿을 수 있지만, 신학은 그렇지 않아" 같은 소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신학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고 신앙은 그에 대한 믿음이다. 즉, 신앙과 신학은 매우 밀접하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자. 수학은 지식이다. "1 + 1 = 2" 라는 지식은 "사과 하나와 또다른 사과 하나가 있으면 두 개이다"라는 지식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내 왼쪽 주머니에 있는 사과 하나와 내 오른쪽 주머니의 사과 하나를 생각하며 "나는 두 개의 사과를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너는 사과 두 개를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1 + 1 = 2 라는 지식은 틀린 거야" 같은 소리를 한다면? 그게 바로 신앙과 신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만 해도 어지러운 소리이기는 하다.


하지만 신앙과 신학을 구분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나는 왼쪽의 사과 하나와 오른쪽의 사과를 합해 두 개의 사과가 있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믿을 수 없지만, 왼쪽의 사과 하나와 오른쪽의 사과를 합해 두 개의 사과가 있다고 실제적으로는 믿어" 같은 소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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