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
아기를 출산하는 고통에 대해 너무도 많은 말을 들었던 아내는 열심히 유튜브를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제왕절개를 해도 나중에 자연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많은 의사들이 "제왕절개해도 자연 출산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너무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제왕절개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한테도 관련 영상을 여럿 보내줬기에 나도 꽤 보았고, 나 자신도 설득되었다. 그래. 너무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위험하면 제왕절개를 할 수도 있지.
결국 아내와 나는 이런 결정을 했었다.
유도분만을 하느니 제왕절개를 하자.
우리 주변에 유도분만을 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의 대부분 결국 제왕절개를 했다는 거다. 즉, 자연분만하듯 고생할 건 다 하고 결국 제왕절개해서 후유증은 후유증대로 다 받았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유도분만을 하느니 제왕절개를 하자는 거였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했던 결정과는 달리 아내는 유도분만을 시도하게 되었고, 결국 실패하고 제왕절개를 하고 말았다.
"유도분만을 하느니 그냥 바로 제왕절개를 하자"는 우리의 결심은 실제로 적용되지 못했다. 즉, 이 결심은 말로만 이루어졌지, 실제로 구현된 결심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실제와 이론을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결심이지 지식은 아니긴 하다.
제왕절개로 아들을 낳은 아내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둘째는 자연분만할 수 있을까요?
의사는 말하기를, 위험해서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게 바로 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이 구분되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유튜브에 올라와 있던, 제왕절개 하고도 자연분만 할 수 있다던 의사들의 말은 무엇인가? 이론적으로 제왕절개 한 뒤에 자연분만을 할 수 있어도, 실제로 의사들이 비추한다면 산모들은 제왕절개 뒤 자연분만을 할 수 없다. 제왕절개 이후 자연분만 한다는 건 결국 산모들에게 실제로 적용할 수 없는 이론적에만 머문 지식일 뿐이다.
"있다고는 들었는데 실제로는 본 적이 없어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 의사들은 유튜브에서 "제왕절개 했어도 자연분만 할 수 있어요"라며 "둘째 걱정하지 말고 지금 제왕절개 하세요" 같은 식으로 말하는 걸까? 처음부터 "제왕절개 이후 자연분만은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나도 그리고 우리 아내도 생각을 달리 했을 텐데 말이다.
요즘 일반 성도들 사이에서 위와 같은 불만을 종종 들을 수가 있다. 목사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는 거다. 내 삶에 적용할 수 없는 설교를 하는데 도대체 이게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데, 적용할 수 없으면 모조리 필요 없는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극단적이다.
물론 아래 링크와 같이 신앙과 구분되는 신학을 전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일상의 신앙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신학은 우리의 삶과 교회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아니, 애초에 적용할 의지도 없기 때문에 죽은 지식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대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삼위일체가 뭐가 중요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신학은 문법과 같아서 배울 때는 전혀 중요한 거 같지 않아도 실제로는 중요하게 사용된다.
"Have - Had - Had 같은 게 뭐가 중요하냐, Break - Broke - Broken 같은 걸 외워서 뭐에 쓰느냐"는 식으로 문법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외국어를 사용하다 보면 문법을 계속 찾아서 보게 된다.
신학도 비슷하다. 평소에는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하나도 모르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 공부를 다 빠졌던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신앙적 질문을 만나고 나면 그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자동차 학원에 다니지 않고) 자동차를 타면서 운전을 배우는 것처럼 좌충우돌이 심하다. 더큰 문제는, 교회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점이다. 내가 가진 믿음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후에 믿음을 둘로 구분한 신앙과 신념에 대해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뭐, 그 외에도 죽은 지식이 존재한다. 나는 교회를 쉽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면 이 사람들의 말은 죽은 지식에 근거하는 걸 느낀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어보면 근거가 희박하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라는 건지 알 수 없다.
아래의 내용을 보면, 동성애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교회는 "동성애자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다만, 동성애가 죄라고 말할 뿐이다.
즉, 교회는 감옥에 있는 범죄자라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게 그 사람들에게 착취를 당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범죄자가 살인하는 것, 성폭행하는 것, 사기치는 것을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거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같은 논리를 동성애에 가져간다.
즉, 교회는 동성애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동성애는 죄라고 인식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동성애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두 가지 중 하나다. 이 사람은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아니면 이 사람의 주장은 틀렸거나 이다. 그런데 만약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 라고 말하지 못할 거면서 "교회가 동성애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의 주장은 죽은 주장이 된다.
여기서 저런 비판을 들은 사람은 "그래서 도대체 동성애자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데?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생각하는 건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교회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으면서 교회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하는 비판은 죽은 비판이다.
교회 안에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지식들이 있다. "사랑해야 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는지 말하지 않는 경우가 그렇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 설교나, "당신들은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는 지식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물론 너무 방법론에만 빠져들게 되면 정 반대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실제적인 걸 가르친답시고 방언하는 법이나 구원받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건데, 은혜가 아닌 내 힘과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지식은 결국 복음을 유사 복음으로 바꿀 수 있다.
구원을 받는 비법 같은 경우는 우리에게 속한 지식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한다. 비밀이지만 밝혀진, 드러난 비밀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가진다. 왜냐하면, 듣고자 하는 자에게 열려 있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비밀이 주어진다. 그러나 주어진다는 건 우리 노력으로 쟁취한다는 게 아니라 은혜로 받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혜자에게 이 비밀이 감추어졌다는 거다. 자기 힘으로, 자기 지식으로 가지려는 사람은 이 비밀을 얻지 못하는데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비밀이 주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이 비밀을 얻는 게 아니라 은혜로 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은혜다.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10:21-22]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구원받는 비법이라거나 성령받는 비법 같은 소리를 한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물론 구원 받기 위하여, 성령 받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이지 구원받는 방법론이나 성령 받는 방법론으로 쟁취해낸 게 아니다.
이번에 죽은 지식에 대하여 다루었다. 물론 적용할 수 있는 지식들은 중요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처럼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이 지식을 행할 때 우리의 변화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적용할 수 없는 지식 중에는 신앙과 분리된 자유주의 신학처럼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식도 존재한다. 설교자가 삶을 몰라서 뜬구름 잡는 설교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용할 수 없는 지식, 방법론으로 만들 수 없는 지식이라고 해서 다 쓸모없는 지식인 것은 아니다.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문법을 배우는 기간처럼 우리 신앙을 세우는 기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만 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잘 알아서, 죽은 지식과 산 지식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