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설정이 대화에 중요한 이유

카테고리 설정을 못하면 대화가 엇나간다

by 초덕 오리겐

Intro


아이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가 ‘카테고리 설정’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말은 맞는데 실제로는 틀린 이해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카테고리 설정이라는 것은,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하게 되는 일이다. 심지어,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기본적인 일이다.




케이크 그림을 먹고 싶다고?


예를 들어 보자. 아이가 그림을 가리키며 “이거 먹고 싶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래? 그림을 먹고 싶어?”라며 그림을 떼어 먹이려 한다면 그것은 코메디가 아닐 수 없다. 아이가 가리킨 것은 ‘그림’이지만, 아이가 의도한 대상은 그림 속에 있는 ‘사과’나 ‘케이크’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가 가리킨 것은 그림이 맞다. 그러나 아이가 의미한 카테고리는 ‘그림’이 아니라 ‘음식’이다.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아이가 사진을 보며 “이 사람이 나를 때렸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진이 아이를 때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대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해석한다. “사진 속 사람이 때렸구나.”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면, 아무런 설명이 없더라도 사진이 아이를 때린 게 아니라 사진 속에 등장한 사람이 때렸다고 생각한다. ‘그림’이라는 물질적 대상과 ‘그림 속 인물’이라는 서사적 대상은 서로 다른 카테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사진도 사람을 때릴 수 있지"라고 말한다면, 아래의 링크와 같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왜냐면, 맥락 속에서 아이가 설정한 카테고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카테고리를 구분하며 사고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대화 중에 카테고리 설정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대화중에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동일하게 카테고리를 설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설정한 카테고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코메디언들은 이 카테고리 설정이 서로 다를 때 일어나는 상황을 코믹하게 그리곤 한다.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


위의 링크에서도 이야기하지만, 카테고리 설정을 못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를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을 한다. 아이가 케이크 그림을 가리켜 먹고 싶다고 말했다고 그림을 먹이는 사람이나 똑같은 거다. 그래놓고 말하기를, "아이가 이거 가리켜서 먹고 싶다고 말했어."라고 말하며 자기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한다. 겉으로 볼 때는 그 말이 맞다. 아이가 케이크 그림을 손으로 가리켰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틀린 말이다.




아이를 가르칠 때


그런데 아이를 가르치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테고리 설정을 가르치게 된다. 처음에는 꽃 그림을 보고 <꽃>이라고만 가르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해바라기나 코스모스 같은 꽃 이름을 알려주게 된다. 강아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개 그림이 나올 때마다 <개>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게 되면 우리는 진돗개와 시바견, 닥스훈트나 말티즈 등을 구분하여 가르친다.


아주 어릴 때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 모든 음식을 <맘마>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게 되면 맘마(밥)과 까까(간식), 물을 구분해준다.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나면 맘마(밥)이 자장밥과 카레, 고기, 소시지 등으로 구분된다.


이렇게 카테고리 설정은 20개월 된 아이도 배우는 것이다. 맘마(우유)는 먹고 싶지 않지만 물은 먹고 싶을 때, 아이는 맘마와 물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 현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사실이다. 동물 그림을 보여 주며 가르칠 때 아이가 계속해서 “이건 동물이야”라고만 말한다면,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강아지 그림을 보거나 송아지 그림을 볼 때마다 동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이를 가르칠 수가 없다.


그래서 “이건 동물이야”라고만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동물이라는 상위 범주 아래에 사자와 토끼는 서로 다른 하위 범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가 단지 동물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자’, ‘토끼’, ‘말’이라는 구체적 종을 가르쳐 주고 싶은 거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이나 업무 환경에서 카테고리가 세분화될수록 그 분야에 대해 이해가 정교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해보자. 다양한 조미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전문성을 의심하게 된다.




신앙에서도


위에서 동물 이야기를 했지만, 이번에는 음식 이야기를 해보자. 케이크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아이가 “이거 맘마(음식)”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실제 삶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가 맘마를 먹고 싶다며 계속 케이크 사진을 가리켜 "맘마"라 말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는 부모가 아이가 배고프다 생각해서 우유를 줬다고 해보자. 아이는 우유를 손으로 밀어버리고 다시 케이크를 가리킨다. (실제로 우리 아이가 자주 하는 행동이다.)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거다.


결국 아이 입자에서 “음식”이라는 상위 개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과”, “케이크”, “우유”처럼 구체적인 구별이 필요하다. 그런데 카테고리를 잘못 설정하면, 옳은 말을 하면서도 잘못된 결과를 얻게 된다. 케이크를 생각하며 맘마(먹을 거) 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우유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는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어떤 카테고리 안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


만약 이 문장을 단순한 ‘사후 보장 문구’로만 이해한다면, 믿음은 현재 삶과 분리된 개념이 된다. 예배도, 순종도, 삶의 변화도 필요 없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말을 행위와 삶의 변화를 배제하는 면허증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런 얕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믿음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존재의 전환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사건이다. “천국” 또한 단지 죽어서 가는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고, 믿는 자는 이 땅에서부터 그 통치 안에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은 미래적 약속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삶의 변화를 포함하는 선언이다.




신앙과 신학


비슷한 오류가 있다. 바로 신앙과 신학이라는 개념이다. 신학이라는 개념은 사실 신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생긴다. 예배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의 예배에 문제가 생긴다. 즉, 신학이 잘못되면 신앙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신학에 대한 카테고리 설정이 잘못되었다.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이해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학과 신앙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즉, 신학을 하는 자기들은 똑똑한 사람들이고, 신앙에 빠져 있는 교회의 일반 성도들은 무지함 속에 있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교회의 일반 성도들도 신학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신앙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만 봐야지 신학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교회를 보면 양 극단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반 지성주의와 무식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고, (자유주의) 신학이 옳고 예수의 부활을 믿는 건 틀리다는 사람들이 있다.





정리하며


이제 글을 정리해보자. 카테고리 설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에도 그렇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도 중요한 문제이다. 다만, 이것이 워낙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또한 카테고리 설정의 문제는 우리의 성장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 우리는 아이에게 “이건 그림이야”라고만 가르치지 않는다. 그림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무엇과 구분되는지를 점점 세분화해서 가르친다. 그래야 아이의 사고가 자란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의 모든 교육도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산수를 가르친다. 한국사를 가르친다. 하지만 한국사는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등으로 나뉘고, 산수는 적분과 통계 등으로 나뉜다. 만약, 이러한 구분 없이 그냥 덧셈과 뺄셈으로 모든 계산을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수학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하지만 수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다면, 덧셈과 뺄셈을 지나 곱셈과 나눗셈을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아무 것도 모를 때는 그냥 사영리 복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신앙이 성장한다면 믿음이란 무엇인지, 예수란 누구인지,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알아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십계명을 알아가게 된다. 더 나아가 사도신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주기도문에 나타난 우리가 이룩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 비전을 깨닫게 되며, 십계명 속에 나타난 기독교 윤리를 알아가게 된다. 즉, 신론, 기독론, 교회론, 기독교 윤리 등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십계명은 폐지됐다> 같은 소리로 기독교 신앙에서 십계명을 제거한다면, 수학에서 뺄셈을 곱셈을 제거하는 것처럼 웃기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수학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곱셈을 제거할 수 없듯이, 신앙을 조금이라도 안다(신학)면 십계명을 제거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토론이나 대화 중에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이 설정한 카테고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똑똑해 보이는 게 아니라 무식해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