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그리고 아마 지금도) 유행하던 문학 스타일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꽤나 많이 나왔던 것이다. 바로, "악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 악인이 악인이 아닌 것처럼 그리는 것이다. 이러한 유행이 문학에서 악당을 단순한 악당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인물이 되게 만들었다. 악당이기 위한 악당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악인이 아닌 걸까? 뭐, 성폭행범에게 이유가 있었다면 그 사람은 성폭행범이 아닐 것인가 묻는다면 아마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말할 것이다.
민수기 23장
11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12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13 발락이 말하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
민수기 23장을 다 보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서 11-13절만 올렸다. 민수기를 보면, 발락이 어떻게든 발람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한다. 그래서 발람이 세 번이나 이스라엘에 대해 저주하려고 하는데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축복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정치권을 보면 이러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신상털이를 하는 사람들이다. 유명 유튜버나 연예인들 신상을 어떻게든 털어서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극명한 예 중에 하나가 바로 타진요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끝까지 추적해서 상대방 신상을 털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의 모습이 민수가 23장에 나오는 발락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든 나의 대적을 저주하려는 모습과, 어떻게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죄를 찾아내려는 사람의 모습이 똑같다.
좌파이든 우파이든 상관 없이 페북에서 정치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내로남불인 것을 볼 수 있다. 위치, 장소, 입장에 따라 누군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거다. 똑같은 잘못이라도 내 진영에 속한 사람의 잘못은 털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대 진영에서 저지른 잘못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죽일 놈이다. 정권을 바꿀 만한 잘못이다.
이건 기준과 잣대가 엿가락처럼 바뀌는 거다. 나와 아는 사람이라면, 나와 친한 사람이라면 느슨한 잣대를 들이대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기준이 마음대로 바뀌는 것에서 나왔다. 사람에 따라 기준이 바뀐다면 그 기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스스로를 진보라 말하는 사람이나 보수라 말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백이면 백 그 기준이 매우 편협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누구 한 사람 화장실에 가거나 할 때마다 서로 욕을 하는 거다. 한 번은 친구 A가 껌을 나눠준 적이 있는데, 껌을 받은 친구 B가 또 껌을 줬다는 이유로 친구 A를 욕했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싫어서 이 친구들을 떠나 다른 반 아이들과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몇 년 뒤, 친구 C에게 이 이야기를 하게 된 적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게 된 발단은 친구 A가 워낙 착하다는 대화 중에 나왔다. 워낙 착해서 자기가 가진 걸 친구들에게 베풀었지만, 누군가는 그걸 뒤에서 욕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 C가 도대체 누가 친구 A를 욕했는지 말해보라는 것이다. 말하기 싫다며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친구 B가 친구 A를 뒤에서 욕했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러자 친구 C가 이렇게 말했다. "안 믿을래."
내가 여기서 충격을 받은 것은, 사람에 따라 잣대가 바뀐다는 사실이었다. 이 친구는 자기가 굉장히 의리 있는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실제 있었던 일보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누구냐고 묻지나 말 것이지.) 그런데 정치도 이와 비슷하다. 상대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덮어놓고 믿는 학연, 지연, 혈연도 이러한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대가 부자라서 나에게 유익이 된다면) 무전유죄 유전무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영에 따라 잣대가 달라지는 것이다. 내 진영에 대해 의리를 지킨다며, 상대방 진영에는 가혹하게, 내 진영에는 느슨하게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이게 마치 인간적이고 정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정의를 굽게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특히 외국인들과 만나게 되면 자주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외국에 나갔을 때 자주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한국인지 소수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문화적 차이를 조화시켜야 할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일본인 친구와의 독도 문제이다. 한국인은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배웠고, 일본인은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누가 맞을까?
친화력이 좋은(?) 사람들은 일본인에게 굳이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나 일본 사람이 많은 공동체에 들어가 있다면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이나 쉽지 않다. 게다가,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에게 "너네는 독도가 한국 거라고 (근거도 없이) 우기지 않느냐"고 말하곤 한다. 뭐, 많은 한국인들이 독도 문제로 일본인 친구들과 싸웠기 때문에 저런 반응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독도는 한국 땅이 맞을까? 아니면 내 위치에 따라, 내가 있는 장소에 따라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관점에 따라 진리가 달라진다면, 한국 사람에게는 독도가 한국 땅인게 맞고, 일본 사람에게는 독도가 일본 땅인 게 맞은 걸까?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여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진리가 뒤바뀔 수 있다면, 위안부의 존재는 거짓이라는 일본인의 말도 사실이고, 위안부의 존재는 역사가 증명해준다는 한국인의 말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입장에 따라 뒤바뀔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를 하다 보면 답답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무슨 주장을 하면, "그건 좌파의 논리야"라거나 "그건 우파 주장이야" 같은 소리를 하며 말을 막는다. 즉, 이 사람들은 내 논리의 논리성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많은 좌파와 우파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저러한 자세가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를 망친다.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진영에 따라 논리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정당이 말하는 것을 정답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논리적이어도 상대방의 주장은 "그쪽 진영이라서 그래"라는 말로 일축해 버린다.
누가 말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주장인지가 중요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누가 말했는가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메시지의 내용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를 따져야지, "저 사람이 말했으니까 일단 틀린 걸로 보겠어"라는 자세는 건강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할까? 하나님은 입장에 따라 바뀌지 않는 분이다. 내 적이라고 어떻게든 여죄를 찾아내고, 내 편이라고 죄를 감추시는 분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는 절대 감추어지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가실 뿐이다.)
내가 처음 읽고 충격을 받았던 말씀이 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말씀들이다.
[출23:1-3] 1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재판 중에 가난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 편을 들어주고, 부자라고 적대하는 재판장이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있다.) 아마 스스로는 정의감에서 그런 행동을 할 것이다. 또는 인기를 얻으려는 마음(포퓰리즘)에 그런 행동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이다. (물론 부자 편을 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재판에서 부자냐 가난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에게 죄가 있냐 없냐가 중요하다. 실제 사실이 뭔지가 쟁점이 되어야지, 그 사람의 진영이나 부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은 입장에 따라 바뀌지 않으신다. 인기에 따라 정의를 굽히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의 잣대와 기준은 언제나 정확하다.
가룟 유다를 아는가? 본디오 빌라도도 아는가?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정의를 굽혀 예수를 죽게 한 사람들이다. 가룟 유다는 금전을 위해 예수를 팔았고, 본디오 빌라도는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사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자기 헤게모니와 유익을 위해 진리를 외면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교회 내에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 사실 사역자들 중에도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구역질이 날 때가 있다.
헤게모니 다툼의 성격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들은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강한, 강약약강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약한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강한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다. 자기가 봤을 때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의 말이라면 무시한다. 즉, 이런 사람에게는 진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는 사람을 여럿 경험해보았다. 이 사람들은 자기 주장이 관철되는 게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한 번은 엄청 강력하게 "A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하는데, 몇 달이 지나고 나서는 "A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한다. 갑자기 주장이 180도 바뀐 것이다. 즉, 이 사람은 A를 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목소리가 남에게 들리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 (물론 아주 가끔 의견이 바뀔 수도 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가 뭐라고 주장했었는지도 잊고 있었다. (즉, 그 주장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거다.)
이 사람들에게 주장은 자기 자신을 위한 주장이다.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또는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되기 위해서 하는 이기적인 주장이다. 그래서 나는 헤게모니 싸움을 거는 사람과는 되도록 인연을 맺지 않는다. 물론 그 사람과 함께 한다면 인생이 보다 쉬워질 것이다.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는 배타적이면서도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향력 있는 진영에 들어가 탄탄대로를 걸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인기 영합주의자들과 함께 한다면 꽤나 인기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정의 앞에서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헤게모니 싸움을 거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랍시고 진리는 다양하다느니, 악인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죄를 저질렀으면 죄인일 뿐이다. 그리고 같은 진영, 같은 편이라고 옹호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