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도인 나는 항상 메시지와 메신저를 구분해서 생각해왔다. 그리고 메신저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릇을 생각해보자.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다. 어디에 놓여 있는 음식을 먹을 것인가? 사실 나에게는 금그릇이든 은그릇이든 상관이 없다. 그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아무리 그릇이 비싼 그릇이어도 그 위에 똥이 올려져 있으면 먹지 않는다. 아무리 이 그릇이 싸구려 그릇이어도 그 위에 음식이 들어가 있으면 먹는다.
컵으로 예를 바꾸어 볼까? 아무리 이 컵이 싸구려 컵이라도, 그 안에 깨끗한 물이 있으면 나는 마신다. 그러나 이 컵이 순금으로 만든 비싼 컵이라도, 그 안에 있는 물이 더러운 물이라면 마시지 않는다. 즉, 메시지가 중요하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체, 용기, 메신저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도 율법의 정신(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잊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주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아무리 잘 지키더라도 그 율법으로 이웃을 미워하고 죽인다면 그것은 죽은 율법이 되는 것이다. 즉, 율법이라는 포장이 아니라 율법 안에 담긴 내용물(사랑)이 중요하다는 거다.
사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메시지가 메신저보다 중요한 이유 말이다.
먼저 초대교회 이야기를 해보자면, 어거스틴 시대에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와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도나티스트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도나티스트들은 세례의 유효 여부를 세례를 베푼 주교에게 두었다. 즉, 로마 박해 때 신앙을 버렸다가 돌아온 주교는 주교 자격이 박탈되고, 그가 베풀었던 세례는 무효가 된다는 거다.
그래서 어떤 사제가 주교가 되는데, 도나티스트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 주교를 만든 사람이 전에 믿음을 배신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알기 쉽게 현대적 적용을 해본다면, 어떤 목사가 일제 시대 때 천황에게 절했던 목사에게 안수를 받았을 때 그 목사의 안수도 폐지해야 한다는 소리다.)
어거스틴의 경우, 세례를 포함한 성례의 유효성은 그리스도이지 주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주교에게 능력이 있어서, 그 주교가 세례를 베풀면 그 세례에 힘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거다. 세례는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한 거고, 주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 당시의 메신저(주교)보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그리스도의 사역)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메신저가 넘어지더라도 메시지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것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아래의 대화를 읽어보면, 성으로 넘어진 사역자들 때문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애초에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실망하는 거라고 본다.
사람은 원래 죄인이고 넘어지는 존재들이다. 특히나 교회는 그리스도인(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알고, 이 죄성을 이길 길은 그리스도뿐임을 안다.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찬양 사역자여도, 아무리 뛰어난 설교자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보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전달하는 메시지만 받을 뿐이다.
말씀 사역자인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우리가 누구인지보다 우리가 간직한 메시지, 복음이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말을 잘하고, 내 설교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지가 아니라 그 속에 복음이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거다.
처음에 했던 그릇 비유를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금그릇이든 은그릇이든 그 암에 음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비싼 컵이라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물이 더러운 구정물이면 사람들은 마시지 않는다. 즉, 메시지를 봐야지 그릇을, 컵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내 블로그가 점점 유명해지고, 사역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음에도 내 개인적인 이름이나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페북에서 내 이름을 걸고 사람들의 호의를 구걸하며 잘난 척 글을 올리지도 않는다. 내가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전부 익명의 사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어느 교회를 가고 어느 집회를 가나 꼭 하는 설교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복음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메시지들이며, 내 신앙의 정수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무엇인가 하면, 똑같은 설교, 똑같은 설교자인데 청중의 반응은 항상 다르다는 거다. 어떤 집회에서는 싸늘하고, 어떤 예배에서는 사람들이 운다.
순회 찬양 사역자들과 대화를 해보았는가?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CCM 사역자 중 한 사람과 잠깐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의 말이 가관이다. 똑같은 찬양, 똑같은 레파토리인데 어떤 집회는 정말 은혜롭고 어떤 집회는 인도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다.
내가 장소라고는 했는데, 보다 정확하게는 거기에 참석한 참석자들의 공동체에 따라 반응이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똑같은 참석자여도, 누구와 같이 있느냐, 언제 듣느냐에 따라 반응이 갈린다. 똑같은 설교를 첫 번째 들었을 때는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두 번째 들었을 때는 완전히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내가 들었던 생각이 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내 능력과 내 노력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고. 어거스틴의 말이 나에게는 매우 강력하게 다가왔다. 은혜의 근원은 사역자의 능력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것을 잊어버린 순간 사역자는 교주가 된다.
전하는 사람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칼빈신학교에 들어가서였다. 똑같은 메시지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른 것을 다시 생각해보면서였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의 근원이라는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메시지여도 메신저가 누구냐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지는 것은 분명했다.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라는 설득의 3요소를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는 삶에서 이것을 느낄 수 있다.
재미있는 건, 내가 어느 공동체에 가느냐에 따라 내 발언권에 차이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이것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자.
먼저 기존의 내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아마 이것을 이야기해야 내 생각의 전환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번 내용에 대해 매우 공감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호의와 권리라는 말을 아는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안다는 거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보통 인격이 덜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이기적인 인간들이라는 거다. 이런 이기적인 인간들은 대개 주도권 다툼을 한다.
나는 온라인으로 토론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종종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드러내고 싶어서 토론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는 개뿔도 모르는데, 뭐가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건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단 기본부터 배워 오라고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교회를 사랑해서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내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 말이 잘 먹히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아무 의견이나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겨울에는 "왜 수련회 때 연극을 준비하지 않느냐"고 따져서 여름수련회 때 연극 시간을 넣었더니 "왜 사역자들은 항상 수련회 때 연극을 넣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보았다. 즉, 내용이 아니라 <나>가 중요한 사람들이 꽤 많다. 자기 헤게모니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나온다. 물론 성경은 이 사람들에 대해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역자 말에 항상 반대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교회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권위자를 깔아뭉개면 내가 그 권위자보다 대단한 사람처럼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가장 반대하기 쉬운 사람은 교회에서 가장 밑바닥 카스트에 위치한 부교역자이다.
재미있는 건 어느 교회를 가나 이런 주도권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주도권 싸움을 거는 사람들과 항상 대면해야 한다.
미국의 칼빈신학교에 다닐 때도 주도권 싸움을 잘 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나이가 한참 많아도 은근슬쩍 반말을 하거나, 상대방의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거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주도권 싸움을 거는 사람들과 몇 년을 싸워야 할 일이 있었다. 보직 자체가 그런 거였다. 매일 싸움을 걸러오는 사람들과 말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을 겪으며 인간 관계에 대해 여러 번 생각했던 거 같다. 그리고 주도권 싸움을 어떻게 걸고 어떻게 상대방의 주도권을 빼앗는지를 터득하고 그것에 점점 능숙해졌던 거 같다. 뭐, 몇 년간 그곳에서 말싸움해서 진 적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던 게 있다. (물론 그 전에도 견지하던 삶의 자세이기는 했다.) 주도권 싸움을 거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내가 주는 호의를 권리로 알고, 어떻게든 나에게서 호의를 갈취하기 위해 주도권 싸움을 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관계에 지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주도권 싸움을 거는 사람들과 관계할 때 내가 취하는 접근법이 있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아래의 링크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일단 최대한 호의를 베푼다. 사실상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할 수 있는 호의를 베풀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나는 미국 칼빈신학교에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정보를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다. 칼빈신학교에 새로 들어온 입학생을 위해 평소에 최대한 물건(가구)을 모아두었다가 이사오기 전에 그 집에 셋팅해주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냐고 싫어했던 사람들도 많았긴 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지 굳이 알리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도권 싸움을 걸지 않는다. 주도권 싸움을 걸면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발언권을 얻고,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최대한 모든 사람과 대등한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건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삶의 자세이기는 했다. 예를 들어, 나는 결코 반말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상대가 나에게 반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이걸 불편해 한 사람들이 꽤 많긴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반말을 하면 좀더 상대방을 쉽게, 가볍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을 배려하면 두 종류의 반응이 있다. 어떤 사람은 같이 배려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는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선을 넘는다. 주도권 싸움을 거는 것이다. 호의를 베풀면 그것을 권리로 아는 거다. 나는 이런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 (심지어 사역자들 가운데에도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위에 설명했지만, 그러니 목사를 바라보지 말고 메시지를 바라보자.)
보면 알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무리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해도 선 넘는 사람, 주도권 싸움을 하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맺지 않는다. 왜냐하면 먼저는 1) 그 관계가 나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2) 그 사람은 인성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에게는 갑질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같이 식당에 갔는데 종업원에게 갑질하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를 조용히 끊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요즘에는 조금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그런 사람이라고 품어야 하는가가 요즘 내 질문이다. 물론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왕따를 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관계를 조금씩 끊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인지 요즘 생각해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만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굉장히 부러워한다. 어떻게 내 주변에는 그런 좋은 사람 밖에 없냐는 거다. (왜냐하면 무례한 사람, 주도권 싸움을 거는 사람과는 은근슬쩍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아까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웬만하면 주도권 싸움을 하지 않는다. 주도권 싸움을 거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져준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은근슬쩍 끊는다. 물론 그 사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도 은근슬쩍 관계를 피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들에 대해 욕하거나 뒷말을 흘리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냥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 않을 뿐이다. 요즘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지만, 아무튼 굳이 싸움을 거는 사람들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자세에 대해서 이상하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오리를 가자 그러면 십리를 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성경은 결코 착취 당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데이트 폭력을 당하거나, 바보 취급을 당하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싸우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바보 취급을 받거나 무리 내에서 발언권이 낮아진다. 내 의견이 얼마나 옳은지 강경하게 주장하지 않으면 내 의견은 바보 같은 의견이 된다. (그리고 이건 팁인데, 바보 같은 의견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는 굳이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없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에는 계기가 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곳에 있었던 모두가 그냥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목사 아니면 강도사였다.
종강 파티 때 커피를 준비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차도 같이 준비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지금 Food Pantry에 녹차가 들어왔는데, 이거랑 전기포트 하나만 준비하면 차 준비는 다한 거라고 말했다. (참고로 칼빈신학교의 Food Pantry에 있는 것들은 무료로 가져올 수 있었다.)
이때의 반응은 놀라웠다. 다들 굳이 힘들게 그걸 준비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커피포트 하나만 가져오면 따로 준비할 게 없는데도 반대에 부딪쳤다. 세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거절당했다. 그리고 이때 나는 굳이 이걸 가지고 싸우지 않았다. 본질적인 건 아니지 않은가? 싸울 필요는 없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종강예배 당일 오전, 회장과 함께 Food Pantry에 방문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차를 보더니 회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회장도 굳이 준비해야 하느냐고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저희, 이거 가져가서 준비해도 될까요?
내가 놀란 건 그 다음이었다. 분명 내가 이야기했을 땐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이었는데, 회장이 이야기하니 갑자기 이건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 되었다.
이때 깨달았다. 목사들도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보는구나. 심지어 박사 공부를 하러 왔다는 사람들도 논리보다는 사람을 보는구나. (이러니 우리나라 정치가 정책이 아니라 진영을 찾는 거 아니겠는가 싶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메신저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찬양 인도를 한다면 가사만 띄워놓고 인도자는 앉아서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찬양 인도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블로그에 내 이름을 올리지 않고, 굳이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홍보하지도 않는다. 설교도 메시지가 전달되야지 메신저인 설교자가 전달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메신저보다 메시지, 즉 복음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땅에서는 메신저도 중요하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동일한 복음이라도 삶이 난장판인 사람이 전달하면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 나와 같은 상황,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목소리가 목사의 목소리보다 더 잘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음을 전하려면 메신저는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메시지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메시지를 보지 않고 메신저를 바라본다.
(때로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주도권 싸움을 해야 하나 생각도 든다. 정말이지 인간적인 생각 아닌가? 복음과 은혜가 아니라 방법론을 찾는 게 말이다. 물론 방법론은 필요하다. 방법론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겠지만. 방법론을 아예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오지만, 메신저만 바라보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인지 메신저가 넘어지면 듣는 사람도 같이 넘어진다. 아니, 말씀의 소스는 메신저가 아니라 하나님인데 왜 메신저를 바라보는가?
교회에서 메시지를 무수히 들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없다. 이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목적은 메시지가 아니라 사람(메신저)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10년을 교회 다녔어도 아무 것도 모른다.
메신저를 보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나온다. 1) 메신저가 우상이 된다. 2) 메시지가 보이지 않고 메신저의 실수만 보인다. 메시지, 그러니까 복음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메시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즉, 우리 스스로는 메시지를 바라보되,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좋은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메신저보다 메시지, 복음, 예수를 바라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되, 아직 연약한 그리스도인을 위해 좋은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