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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세우는 것의 어려움

칼빈에서 새벽예배를 세우다

by 닥그라

Intro


미국 CRC 교단의 칼빈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코로나로 인해 새벽예배 문화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라 한인 공동체 내에서 교류도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나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더더욱 선배들과 교류하기 어려웠다. 그 상황에서 이제 다시 칼빈 신대원 내 한인 공동체를 세워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특히나 우리는 신학생이자 목사들인지라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한인 공동체를 세워야 했다. 예배가 없는 단지 관계만 존재하는 공동체라면 그게 세상 공동체와 아무런 차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인학생회 부회장이었던 나는 찬양 집회를 강조했다. 한 학기에 한 번이든, 한 달에 한 번이든, 심지어 한 주에 한 번이든 상관 없으니 찬양 집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왜냐면 학생들과 그 가족들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미국 교회다 보니 한국어 찬양을 부를 기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한인학생회 회장과 영성 부장이 새벽 예배를 강조했다. 물론 나는 여기에 대해 반대했다. 매일 새벽예배 드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아냐. 그걸 우리가 세운다면 매일 우리가 새벽을 지켜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새벽 예배를 하려면 시작부터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인학생회 회장과 영성 부장은 강력한 동기 의식이 있었다.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찬양 집회 대신 매일 새벽 예배를 하기로 했다.




새벽예배가 시작되다


처음 시작은 순조로웠다. 애초에 그 해 한인 학생회의 목적이 새벽예배 부활이었기 때문에, 그해 한인 학생회는 새벽예배로 특징지어질 정도였다. 그랬기에 한인 학생회 회장의 주도와 독려로 모든 임원들이 참석하였고, 일주일 중 하루는 부흥회로 진행될 정도였다.


새벽예배 참석자 숫자도 엄청났다. 오죽했으면, 당시 칼빈 신학교 한인학생회 카톡방 중에 가장 활발하게 대화가 오가는 카톡방이 새벽예배 카톡방이었을까? 중고 물품을 내놓는 것도 새벽예배 카톡방이 가장 활발할 정도로 당시 새벽예배는 칼빈 신학교 한인학생회 영성의 중심이었다.


물론, 내 기억에 따르면, 처음 새벽예배가 시작했을 때는 선배들이 우려를 많이 했었다. 그러나 한 번 시작하고 나자 이번 한인 학생회는 동력이 엄청나다며 다들 감탄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임원회의 때마다 새벽예배를 반대했었던 나는 회장과 영성 부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어려움


그러나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새로운 문화를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 학기도 채 끝나기 전에 새벽예배를 주도했던 당시 회장이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일단 새벽예배를 시작한지 한 달인가 채 안 되어서 한인 학생회 회장이 새벽예배에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인 학생회의 모든 중점이 새벽예배였는데, 새벽예배에 대한 독려를 멈추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자세하게 이야기할 게 많지만, 여기서 굳이 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사실상 새벽예배를 유지하는 것이 엄청난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간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라 다양한 행사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간단하게만 이야기하자면, 당시 한인학생 회장이 회장직을 내려놓고 싶어할 정도로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새벽예배는 만들어 놓았고, 아침마다 예배를 드리로 오시는 분들은 있는데 예배의 자리를 담당할 사람이 부족했다. 사실상 새벽예배 담당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되고 피곤한 봉사이지 않은가.




찬양 집회였다면 어땠을까..?


이 사건을 기억할 때면 진짜 추진력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한 달에 한 번씩 1년에 여섯 번만 찬양 집회를 했다면, 사실 그렇게 엄청난 추진력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당시 내가 칼빈 신학교 기숙사에서 차타고 5분 거리인 Church of servant에서 설교 목사로 제의를 받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예배당을 빌리는 것도 문제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다들 차를 타고 오는 상황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는 거리는 아니었다.)


목사님들이라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분들도 많으셨고, 찬양 잘하는 분들도 많으셨기 때문에 찬양 집회 준비의 어려움도 그렇게 크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워낙 외국 교회 예배만 드려야 했던 지라, 한국 찬양을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들 기뻐해 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찬양 예배 수준에 대해서도 높은 기대가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오죽했으면 찬양을 못하는 내가 찬양 인도를 했는데도 한국어로 찬양을 부른다는 것만으로 좋아했을까 싶다.


즉, 우리에게 가진 자원과 능력으로 찬양 집회를 학기마다 몇 회씩 진행하는 것은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것이 아니었다. 즉, 누가 이거 준비한다고 지치고 고갈되어서 넘어질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 집회가 아닌 새벽예배 전통을 세우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내 의도가 아니더라도


아무튼 새벽예배가 세워지고 끝까지 유지되는 걸 보면서 나는 진짜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처음에 엄청난 동력으로 대단하게 시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짜 추진력이란 시작이 대단한 게 아니라 끝까지 이끌어 가는 힘이다.


나의 경우에는, 한 번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주도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새벽예배 문화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도록 새벽예배 위원으로 섬기게 되었다. 오죽 새벽예배 위원이 없었으면 새벽예배를 반대했던 나에게까지 제안이 들어왔을까 싶었지만 말이다.


내 의견이 아니더라도 참여하는 공동체를 위한 마음. 사실 이것도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각 교회마다, 그리고 심지어 각 나라의 정치마다 내 의견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중요했던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내 의견"이었을 뿐이다. 즉,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아무튼, 그렇게 새벽예배 위원으로 섬기게 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새벽예배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새벽예배 위원으로 섬기고 새벽예배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게 어떤 마음일지 아는가? 심지어 새벽예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도했던 회장마저 나몰라라 하는 상황에 말이다.


하지만 새벽예배 문화가 정착되어가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새벽예배 문화가 튼튼하게 서 있는 걸 보면서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문화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정리하며


공동체에서 하나의 문화를 세우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다른 사람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심지어 "나"와 같은 반대자들의 의견도 있기 마련이다. 그뿐이랴? 하나의 문화를 세워야 한다고 주도하고 시작했던 사람이 넘어질 정도로 공동체 안에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것을 끝까지 고수하여 만들어낸 사람들에게는 참된 추진력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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