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 3
#누가복음 #고난주간 #가상칠언
[요19:26-27]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가상칠언 중 세 번째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은 고통 중에 있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 말씀은 고통을 넘어서는 회복과 부르심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의 말씀은 무의식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 말씀들은 혼미한 의식 속에서 나온 무의미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조롱과 못질이 시작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두 번째 말씀은 강도 중 하나가 회개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이제, 로마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나누고 있는 장면 속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한을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보라 네 어머니라.”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19:23-25]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옷은 일반적인 유대 남성의 옷처럼 다섯 벌이었고, 군인 네 명은 각각 하나씩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한 벌, 통으로 짜인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를 뽑기로 결정했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어머니가 아들의 사역 시작을 기념하며 옷을 지어주는 일이 관례였습니다. 당시 '사역의 시작'이란, 단지 종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독립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시점, 직업을 계승하거나(예: 목수, 어부, 장인) 자신의 기술을 세상에 드러내는 순간, 또는 랍비 훈련이나 율법 교육자로서의 여정 시작 등, 공적 책임을 지는 삶의 출발을 의미했습니다.
가정은 이 출발을 의복, 상징, 의식 등을 통해 기념하곤 했습니다. 지금 그 속옷이 병사들의 손에 의해 도박처럼 거래되고 있는 모습을,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서 잃게 생긴 그 상황, 아들이 입고 있던 옷이 도박의 대상되어 조롱받는 그 상황 속에서 아들인 예수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요19:26]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참조.
예수님의 옷은 보통의 유대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섯 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속옷 (χιτών, chitōn) – 몸에 닿는 통짜 옷
- 겉옷 (ἱμάτιον, himation) – 어깨에 걸치는 외투
- 허리띠 (ζώνη, zōnē) – 겉옷이나 속옷 위에 매는 띠
- 머리 덮개 – 햇빛과 먼지를 막는 천
- 신발 (샌들) – 가죽끈으로 묶는 신발
병사 네 명은 이 중 네 벌을 각자 하나씩 가져갔고, 마지막 하나인 속옷은 찢을 수 없을 만큼 귀중하고 통으로 짜여 있어 제비를 뽑아 가져가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전통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이 사역을 시작할 때 손수 짠 속옷을 선물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통짜 속옷은 어쩌면 마리아가 아들의 사역을 위해 지어준 옷이었을 수 있습니다. 지금 그 옷이 병사들의 손에 의해 도박처럼 제비뽑기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어머니로서 고통스러워하는 이때 예수님은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γύναι)”라고 부르십니다. cf. 이 “여자여”라는 말은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저희 반 친구의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학교에서만큼은 어머니를 반드시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즉, 이 호칭을 통하여 학교에서는 사적인 가족 관계가 아니라, 공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께서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여자야”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관계의 전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구세주로서 죽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죽어가는 아들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녀도 죄 아래 있으며,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입니다.
[마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지금 그는 부끄러움과 죄책감 가운데 십자가 아래 서 있습니다. 그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사명을 다시 맡기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는 단순히 돌보라는 부탁이 아니라, 무너진 제자도를 다시 회복시키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아, 너는 끝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지금도 너를 나의 일꾼으로 부른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넘어 타인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아들이 아닌 구세주로, 요한에게는 실패한 제자가 아닌 사명을 위임받은 자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관계를 넘어, 존재 자체를 다시 정의하는 선언입니다. 그 말씀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 낙심한 자에게는 다시 회복을,
– 실패한 자에게는 다시 사명을,
– 죄 가운데 있는 자에게는 지금도 은혜의 초청으로 들려옵니다.
구세주가 필요하다면, 사명을 잃고 낙심 중이라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에 응답해야 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허락하심을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또한, 중보자이신 아들 예수님, 당신은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와 제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로, 회복으로, 사명으로 그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저희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단지 관계로만 붙들지 않게 하시고, 구세주로 바라보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요한처럼 실패와 부끄러움 속에 있을 때에도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째, 인생의 슬픔 가운데에서 나의 중심이 다시 구원자 예수께 고정되게 하소서.
둘째, 실패한 요한에게도 사명을 주신 주님, 저를 다시 부르소서.
셋째, 과거의 실수와 죄책감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음성에 다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