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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하신 네 번째 말씀, 절규의 말씀

가상칠언 4

by 닥그라
[마27:45-46]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고통은, 단지 육체의 아픔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잊히는 , 기억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영혼을 무너뜨리는 고통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잊히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잊힘의 절규, 그 단절의 심연에서 터져나온 외침입니다.




첫째, 이 절규는 지옥에 버림받은 자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서 가장 어둡고 깊은 말씀입니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땅 전체에 어둠이 덮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해가 가려진 어둠이 아니라, 출애굽기에서 애굽을 덮은 칠흑같은 재앙의 어둠,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나타나는 상징적인 어둠이었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7:46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말씀은 단지 고통의 한탄이 아니라, 시편 22 1절을 인용한 외침입니다. 예수님의 입에 마지막까지 시편이 머물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버림받는 절정의 구절이 입술을 뚫고 나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편은 고난과 멸시, 조롱, 찔림, 뼈의 탈골, 갈증, 겉옷을 나누는 병사들까지 예수님의 고난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 예언적 시편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내 아버지”가 아니라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외쳤다는 점은 이 절규의 거리감과 단절을 드러냅니다.


헬라어로 ‘크게 외쳤다’는 표현은 절규에 가까운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ἀναβοάω는 ‘위로 격렬히 외치다’는 뜻으로, 단순한 말하기가 아닌 울부짖는 절규를 의미합니다.

참조>
마태복음 27:46의 헬라어 원문
περὶ δὲ τὴν ἐνάτην ὥραν ἀνεβόησεν ὁ Ἰησοῦς φωνῇ μεγάλῃ λέγων…
→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핵심 동사: ἀναβοάω (anaboaō)
구성: ἀνά (ana = 위로, 격렬히) + βοάω (boáō = 외치다, 부르짖다)
단순한 말하기(speak)가 아니라 격정적으로 외치는 것, 즉 울부짖는 절규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며, 특히 깊은 고통이나 하늘을 향한 호소를 표현할 때 등장합니다.

R.C. Sproul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This was the scream of the damned.” -> “이것은 저주 받은 자의 비명이었다”, “망한 자의 비명이었다”, “정죄받은 자의 비명이었다.” “지옥에 버림받은 자의 절규였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 문이 닫히고, 응답 없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완전히 절단된 영혼의 상태를 통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단지 육체로만 고난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이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두려워한 “그 잔”은 바로 이 순간을 의미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숨겨지고,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는 상태—이것이 바로 지옥의 본질,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된 저주입니다. 그는 육체로만 고난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이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온전히 받으신 것입니다.





둘째, 절규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절규는 단순한 인간적 고통의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한복판에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독생자를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 성자 예수는 자발적이고 완전한 순종으로 길을 걸으셨으며,

– 성령은 그 고통을 견디게 하시고, 완수에 이르기까지 붙드시는 능력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께서 분열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일치 속에서 죄인을 위한 구속을 이루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절규는 곧 성부의 정의에 대한 성자의 순종, 죄인을 향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충돌한 자리에서 터져나온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절규 속에서 단지 고통만이 아니라, 사랑의 정점, 구속의 능력, 그리고 우리 구원을 위한 완전한 연합을 듣게 됩니다.

참조>

이 말씀이 오해되기 쉬운 지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버림받으셨다”고 했을 때, 삼위일체 간의 본질적 단절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신중히 말해야 합니다.
–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ontologically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신 것이 아닙니다.
– 아버지는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삼위일체의 본질은 결코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신학자 헤르만 위치우스(Herman Witsius)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고난 당할 때조차, 그 순종에 대해 가장 기쁘게 받으셨고, 그 대가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와 영광을 갚아주셨다.”

개혁주의 전통, 특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칼빈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 곧 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을 전적으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인들이 받아야 할 모든 벌을 몸소 겪으셨다. 단 하나의 예외는, 그 고통이 예수님을 영원히 붙들 수 없었다는 점뿐이다.” (칼빈, 기독교강요 2권 16장 11절)




셋째, 그분이 잊히셨기에, 우리는 기억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버림받으셨다면, 나는 정말 자유로운가?”

예,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 죄의 형벌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 정죄가 아닌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 하나님께 잊히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단절되셨기에, 우리는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얼굴에서 버림받으셨기에, 우리는 그 얼굴을 향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가 오늘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를 다시 세우는 복음의 중심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으셨습니다. 하늘이 침묵했고, 응답이 끊어졌으며, 고통은 심연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절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절규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사랑을 듣습니다. 우리 대신 저주받으신 아들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잊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존재로 살게 하소서. 감사와 기쁨으로 오늘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 제목 가지


1.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으로 내가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가 되었음을 믿게 하소서.

2.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였던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를 매일 되새기게 하소서.

3. 버림받은 자가 아닌, 부르심을 입은 자로 오늘을 감사하게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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