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과연 상대방을 위한 것인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아래와 같은 말씀이 있다.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2-4]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 종종 안타까운 생각을 듣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아니, 율법주의와 같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바른 율법의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 바로 산상수훈인데, 산상수훈을 율법주의적으로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산상수훈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팔복도 마찬가지다. 나는 팔복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율법의 목적은 사랑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남을 구제한다는 사람이 이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가는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봉사나 후원을 한다. 고아원에 가서 사진 찍기 싫어하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정치가도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가 고아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싫어하는데, 정치가는 자기가 돈을 후원했으니 잔말 말고 사진을 찍으라는 거다.
물론, 정치가가 아니라면 사진을 찍는 게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자기 혼자 집에서 보려고 찍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도와주고 사진을 찍을 때 이걸 뭐라고 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다.
즉, 우리가 눈살을 찌푸릴 때에는,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나 자신을 드러내지 위해서, 말을 바꾸자면 "나를 위해서" 구제를 한 것이다. 이럴 때 이 구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사랑 밖에는 없는 거다.
즉, 예수님이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것은 "너 자신을 위해 한다면 그 구제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말씀하신 거다. 사랑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말씀 그대로 적용해서, "남편을 위해 한 거지만 남편에게 알리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알려야 할까? 이것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율법의 정신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구제를 은밀히 하느냐 마느냐"라는 율법 조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
각 사람에게는 <사랑 탱크>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한다는 거다.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사랑 탱크는 고갈된다.
그렇다면 언제 이 사람의 사랑 탱크가 채워지는가? 바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사랑 탱크가 채워진다. 그런데 이때 채워지는 방법이 언어, 봉사, 선물 등이 있다. 특히나 가족 관계에서 우리는 오른손이 한 일을 감춰서는 안 된다. "내가 이만큼 너를 사랑해"라는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사랑의 신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주는 사람은 열심히 사랑을 주지만, 받는 사람은 사랑 탱크가 채워지지 않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또는 율법주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다시 이해를 해보자. 그렇다면 오른손이 한 일을 언제 왼손에게 알려야 하는가?
자, 아래의 두 케이스를 보자.
a: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 상대를 위해 이야기
b: 내가 이만큼 했다 <- 나를 위해 이야기
여기서 예수님이 비판하시는 것은 b이다. 즉, 알리는 행위 자체는 똑같더라도 누구를 위해서 했느냐에 따라 정당화가 되느냐 마느냐가 갈라진다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려는 사람에게는 <나>에게 포커스가 맞춰진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먼저라면 <나>는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의도(사랑)가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행위에 종노릇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즉,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들켰어요"라며 마음이 어려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들켜도 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제할 때 <나 자신을 위해> 나팔을 분 사람이야 자기가 원하던 상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해서 (즉, 보물을 하나님께 쌓아둬서)> 이웃에게 구제한 사람은 이것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상을 받은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 안에 포함된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해석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율법주의적으로 적용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어디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율법주의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생겨났을까 종종 생각해보게 된다. 복음주의(알미니안)의 경우에는 복음 +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해하지만, 개혁주의를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내 말을 율법주의적으로 지켜라"가 아니라 "사랑하라"이다.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사랑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사랑받을 요소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저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능력을 주셔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행위 그 자체(모르게 하느냐 마느냐)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 행위(드러내는 것이든 숨기는 것이든)가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족하다. 상대방을 사랑해서 상대방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감추든, 상대방을 사랑해서 내가 얼마나 상대방을 사랑하는지 깨달았음 해서 알리든 행위 자체보다 의도가 더 중요하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