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피 Aug 23. 2018

하얀 벽과 초록 창문의 예쁜 마을이라고 하더라고요.  

스며드는 비야 데 레이바, 이곳은 콜로니얼 도시


처음 만난 도시가 만들어내는 기시감



창밖을 내다보니, 깎아내린 낭떠러지이다. 간간이 나뭇가지가 창문을 긁는 소리도 들린다. 좁고 구불거리는 산길을 대체 얼마나 올라가는 걸까. 풀, 나무, 하늘, 풀, 나무, 하늘. 파란 하늘도, 울창한 산도 더는 감탄할만한 풍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샛길이 나올 때마다 여기로 들어가는 걸까, 이제 도착인 건가 하며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던 와중, 드디어 산으로 둘러싸인 빨간 지붕들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어수선해?”


버스는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작은 터미널에 정차했다. 분주하게 짐을 찾는 사람들을 한동안 멍하니 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트렁크에 남아 있는 짐을 꺼내 한데 모으는 기사 아저씨의 손짓에 그제야 우리도 배낭을 찾아 멨다. 이미 모두가 제 길을 떠난 뒤였다.


길가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듬성듬성 망가지고 파인 돌길은 군데군데 공사 차량으로 막혀 있었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예쁜 마을이라던데. 구경은커녕 집집마다 대문 앞에 쌓아둔 나무 자재와 움푹 파인 흙바닥을 피하며 걷기에 바빴다. 엎친 데 덮친 격인지, 날씨는 흐려 곧 빗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산속에 둘러싸인 이 작은 마을이 콜롬비아의 대표적인 휴양 도시가 된 데에는 하얀 벽과 초록 창문, 그리고 어딘가 고풍스러운 느낌의 돌길이 한몫했다. 스페인 제국이 남미를 침략했던 시대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콜로니얼 도시.



콜로니얼 도시란, 일반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건축 및 생활 양식을 간직한 도시를 의미한다. 지배 국가와의 풍토, 재료, 기술 수준, 생활 수준 차이에 의해 피지배 국가만의 독특한 내용을 갖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이후, 영국 및 네덜란드 이주자가 본국에서 수입한 각종 양식에 풍토 조건, 경제적 제약과 같은 식민지 특질을 더해 새로운 양식을 형성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흔히 영국의 고전주의 양식을 간략화해 적응시킨 미국의 건축 양식을 이르는데, 영국계뿐만 아니라 스웨덴계, 프랑스계, 스페인계 등 과거의 지배 국가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퍼져 나갔다. 


콜롬비아의 식민화는 1499년 스페인의 ‘알론소 데 오히라가 ‘과히라 반도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1525년 본격화되었다. 알론소 데 오히라의 발견은 모든 것이 금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일명 ‘황금 도시 신화를 낳았다. 스페인은 콜롬비아의 영구 식민화를 위한 요새 건축과 대륙 탐험을 계속했고, 이내 내륙 깊숙이까지 침투해 콜롬비아 동부와 남부를 비롯한 전 지역에 자신들의 도시를 형성했다. 


콜롬비아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생활 양식의 전면에 있어 과거 지배 국가였던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당시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남미 국가의 도시 중, 보존에 있어 단연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이다.


콜로니얼 도시를 보존하는 데에는 건축 양식, 생활 양식 등을 남겨둠으로써 얻는 문화적 가치의 이유가 크다. 광장과 담벼락을 비롯해 잘 보존된 건축물 사이를 거닐며 간접적으로 당시의 문화를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1954년 국가 기념물로 지정된 비야 데 레이바는, 콜롬비아의 수많은 크고 작은 콜로니얼 도시 중 특히나 그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산힐 근방에 위치한 또 다른 콜로니얼 도시 ‘바리차라와 함께 콜롬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힐 정도다.


수천 개의 자갈로 이뤄진 마을 중앙의 광장은 남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는 흰 담벼락의 집들은 붉은빛 꽃송이의 넝쿨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은 1794년 인권 선언문의 번역문 유포로 남미의 많은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데 기여한 ‘안토니오 나리뇨가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안토니오 나리뇨는 남미의 독립 영웅으로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의 혁명을 보좌한 측근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야 데 레이바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광장과 동상, 기념관 등을 볼 수 있다. 혹자는 비야 데 레이바에 가면, 안토니오가 자신의 열정을 독립에 쏟아붓기 위해 거닐었던 그 거리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여러모로 역사적인 도시임에 틀림없다. 


물론, 콜로니얼 도시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그것을 관광 상품화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도 존재한다. 지배 국가의 경제적 논리에 따라 발전한 생활 모습을 그대로 남겨 두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로, 보존이 아닌 청산을 지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 비야 데 레이바는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높이 사는 이들의 말마따나 ‘과거에 멈춰 있는 도시였다. 다만, 수많은 여행객을 이 마을로 이끄는 그 과거형의 동인이 우리에게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다. 지역 고유의 색이 덧대어진 독특한 무언가를 발견하기 힘들었던 하얀 벽과 초록 창문은 유럽의 어느 거리를 떠오르게 할 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