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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Sep 12. 2018

엄마와 엄마

| About, mother |     애증과 그리움 사이


병원에 계실 때 찾아 뵌 적이 있었다. 나에게 누구냐고 물으셨다.

"할머니 딸 애자 알죠? 애자 딸이에요! 손녀 손녀!"

힘이 없으신지 할머니는 다시 침상에 누우셨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아 드렸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호전된 건강상태로 돌아왔고,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잡아 몇 년을 더 연명하셨다. 고향집을 떠나 삼촌이 계신 인천으로 올라오셨는데 아마 그 시간이 할머니에게는 가장 외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아직도 그 시간에 당신의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할머니 병원에 계시니까 빨리 와”

언니의 전화에 밥을 먹다 말고 급히 일어나야 했다. 순간 할머니 걱정보다 놀랬을 엄마가 더 걱정됐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옆인 강화도 선산에 모셨고,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엄마와 이모들은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오열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나도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어떠한 감정을 뛰어넘어 '엄마'의 죽음은 상상을 하지 못한 슬픔이었을 것 같다.


며칠 전은 할머니의 제사였다. 할머니의 유언대로 교회 식으로 기일을 보낸다.

엄마를 포함해 이모들도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찬송가를 이제 막 말을 떼는 아이처럼 중얼거린다.

그 순간이 무겁다. 그리 느껴진 건 생소하고 두꺼운 성경책 때문이었을까 할머니에 대한 내 마음 때문이었을까.


Photo by Nick Karvounis on Unsplash


올해 동료 선생님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처럼 키워주셔서 애정이 남달라 보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동료 선생님은 불안해 보였고, 돌아가신 이후에도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나 기억이 많이 없어서 매우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엄마가 당신의 손주를 딸인 나보다 더 챙겨 보살피고 있기에 내 조카가 우리 엄마를 '그런 할머니'로 생각할 순 있겠다 싶었다.


“엄마 그거 알아? 미안한데.. 나는 할머니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왜?”

“삼촌만 자식 대우하셨잖아, 그 자식들만 예뻐하시고. 뭐 밥도 따로 먹었는데-”

할머니가 좀 유별나긴 했지. 나도 어떨 때는 아빠한테 미안했다니까”


엄마는 태어남과 동시에 “또 딸이네!” 하는 탄식을 들었다고 했다. 탄식뿐이었으랴, 유년시절을 차별과 매서움 속에서 보냈을 것이다. 다음 해에는 꼭 아들 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애자(愛子)로 작명하셨다는데. 그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으니 아들의 그림자를 머리에 이고 산 것이다.

묘석에 막내 남동생의 아들딸 이름은 올라가 있어도, 딸들의 자식들은 이름 석자 올리지 못했는데 억울하지 않을까.


“엄마 시대에도 그러는데 네 할머니 시대는 어땠겠어. 그냥 시대상이라고 생각하니까 이해가 되더라.

너도 더 나이 들면 지금 엄마가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이해될 거야”

나이가 드니 할머니가 이해된다고 했다.

하긴, 봄에 태어나면 춘례가 되고 막내로 태어나면 말숙이가 되던 시대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할머니의 행동이 유별난 처사가 아이었을 수 도 있다.


아직도 엄마는 큐빅이 알알이 박힌 분홍색 조끼를 보면 할머 생각나는지 다가가  만지작 거린다.

그 모습이 마치 이제 나는 괜찮다고, 당신은 행복하시냐고 말하며 다시 비녀를 꽂아드리는 것 같다.

서운함이 지나간 자리에 애증이 남아 엄마는 아직도 할머니를 그리고 있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
- 한시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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