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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Sep 06. 2018

| Sorry, mother |     발과 눈물 그리고 애달픔


엄마와 드라마를 보다가 본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배우를 보며 관리를 잘 했다고, 역시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손이나 목에 주름은 피할 수 없었는지 고스란히 나이를 드러내 놓은 것을 보며, 역시 사람은 다 똑같은 거라 우리는 각자 자기 위로를 했다.


한때는 엄마의 발이나 목에 주름이 애달프지 않던 시간도 있었다. 나이가 든 거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엄마의 변화보다 나에게 찾아오는 주름 하나가, 잡티 하나가 더 크고 선명하게 느껴져 나를 먼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엄마의 발은 달라 보였다.

그냥, 낡아 보였다.

겨울을 버텨낸 나무같이 거칠고, 마르게 보였다. 그날따라 유달리 '엄마의 발'처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225 사이즈의 작고 아담한 발.

어느 순간 내 키와 발 사이즈가 엄마보다 커졌다. 공유해서 신던 신발도 엄마와 나의 것으로 분명히 나눠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엄마의 발은 자라지 않은 것일까.

나이가 든 할머니들이 키가 줄어들고 허리가 굽어간다고 하시는 것처럼 어느 순간 엄마의 발과 키도 퇴보의 길에 들어 설까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엄마의 발을 만져보면 굉장히 미온적이다. 열심히 달려온 열정을 토해내듯 너무 뜨겁지도 않고, 겨울 설한에 멈춰있듯 너무 차갑지도 않다. 발의 온도가 딱 적당하다. 유난스럽지 않다. 지난 세월의 걸음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한때 기업이든 학교든 세족식이 유행일 때가 있었다. 선배가 후배의, 교수가 제자의 발을 씻겨주면서 서로를 섬기고 존경하는 의미를 담는다. 세족행사가 보여주기 식 일 수도 있겠지만, 발은 여러 신체 부위 중 가장 낮지만 가장 높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장에서 12제자의 발을 씻기고 배신자 유다의 발까지 씻겼다고 하지 않는가. '발'은 삶의 방향과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엄마의 발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날아갈까 조심스럽게 아기새를 안듯 그 발을 잡아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 한없이 발끝 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고개 숙여 당신의 발을 직접 확인할까봐 차마 엄마 발이 나이 든 것 같다는 답을 하지 못하곤 아무것도 아니라며 괜히 발장난을 치고 걸음을 재촉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로댕론’에서 ‘우는 발’에 대해 말한다. 모든 땀구멍에서 솟아나는 엄청난 눈물이 발에 있다는 것을.

서 있을 땐 온몸을 지탱하고 걸을 땐 가해지는 충격을 오롯이 흡수하는 발. 엄마의 발끝에는 60년 세월 동안 온 우주의 충격을 지탱한 고단함이 녹아있다.


그렇게 엄마의 발은 ‘우는 발’이 되었다.










부모의 나이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오래 사신 것을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이 많은 것을 걱정해야 한다.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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