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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roty Oct 17. 2024

남편에게는 비밀입니다

비밀이야기, 열다섯번째날

오늘은 체중측정시간과 혈당측정시간이 다르다. 혈당까지 측정하고 집을 나서면 지각할 것 같아서 혈당측정키트를 가방에 넣고 뛰쳐나갔다. 바로 일어나서 측정하는 것과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난 후라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측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최근에 그런 강박에 시달렸다. 혈당을 계속 측정해야 한다는 강박. 그래서 집에서 근무하는 날은 하루에 다섯 번도 측정하곤 했다. 내가 당뇨환자라서 공복, 식전, 식후에 반드시 측정해야 하는 거라면 기특한 일일 텐데,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서 하루 정도 공복혈당을 빼먹는다고는 큰일이 생기는 정도는 아니라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일전에 몸무게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화장실 가기 전에 재고, 다녀와서 재고, 밥 먹고 재고, 몇 그람이라도 늘어나면 다시 또 미친 듯이 움직이는 강박에 시달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랑 유사한 양상을 띠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 부득이한 경우라면 공복혈당을 측정하지 않고 외출하는 경우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약 7년 전, 나는 약간의 강박을 갖고 있다고 (공황장애, 우울증, 불안장애와 함께) 진단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가진 강박이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며, 본인이 약간 불편한 정도니 약 처방 없이 지켜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권한 것은 '일주일에 하루는 온전한 휴식을 즐기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있으면서 어질러져있는 걸 보면 스트레스받았다. 가령 거실 테이블에 빈 페트병이 올려져 있는 상황이면 그걸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자리를 닦아야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청소'에 대한 강박이 극도로 심해졌는데, 이는 내가 퇴근 후나 주말에 온전히 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그런 내게 선생님은 이런 가이드를 주셨다.


"외면해 보세요. 어질러져있어도 바로 치우지 말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세요."


다음 상담 때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셨나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데요."


내가 치우지 않아도 페트병은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내가 당장 청소를 한다고 한들 집이 조금 더 더러워질 뿐이지 당장 해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컨디션이 안 좋거나 몸이 힘들면 '억지로' 외면하기 시작했다. '미래의 내가 치울 거야, 그때 치우면 돼'라며 나를 다독였다. 휴식을 취한 나는 더 좋은 컨디션으로 집중해서 열정적으로 청소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남편에게 청소로 잔소리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남편이 빈 페트병을 올려두면 치우지 않는다. 가끔 좋은 마음으로 치워주지만, 대체로 그냥 두려고 한다. 본인의 말대로 언젠간 치우더라. 나는 남편의 '언젠간'이라는 말이 싫지만, 나의 강박증 치료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점심은 같은 회사를 다니다 이직한 선배와 먹었다. 12월이면 사옥이 이전한다고 해서, 그전에 한번 보기로 했다. 같이 근무할 때도 나를 한 번 키워보고 싶다고 해서, 호시탐탐 언제 데려갈 거냐고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일 년째 그는 나를 데려가지 않고 있다.


후식으로 콜드브루를 마시면서 식물을 키우면서 얻는 평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햇살 좋은 날에 화분을 볕이 잘 드는 곳에 옮겨두고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화분에 물을 주고 나면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을 보면서 생기를 느낀다, 내가 힘들고 지쳐서 잘 돌봐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주는 것에 고마워 벅차오른다 등을 이야기했는데 '이런 게 나이 들어가는 건가?' 하며 웃었다.


오후에는 어제부터 느껴진 상복부통증으로 병원에 다녀왔다. 병명은 위경련이었다. 특히 빈 속일 때 메스꺼움 같은 불쾌함이 느껴지고, 위의 연동운동이 느껴지는 것처럼 꿀렁꿀렁거리며 통증이 느껴져서 '설마?' 했는데, '정답'이었다. 위경련을 겪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보통은 위염에서 끝이 났다) 신기했다. '이야~ 살아있네~ 위가 펄떡펄떡하네!'라는 경험이었달까.


처방약을 먹고 만사가 귀찮은 나는 전자레인지용 찜기에 만두 다섯 알을 넣고 익혀먹었다. 냉장고를 뒤지면서, 학생 때는 밥 먹기가 귀찮아서 끼니도 대충 거르고 했는데 요즘은 배달서비스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살이 빠지긴커녕 살이 찌는구나, 하고 느꼈다. 그때는 방학 때만 되면 살이 빠진다고 엄마가 걱정하곤 했는데, 이젠 너무 쪄서 걱정일 거다.


만두는 위경련이 있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메뉴라는 것은 다 먹고 이제야 깨달았다. 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위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음을 느끼니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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