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야기, 열여섯번째날
이번주 내내 잠에서 깨어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어김없이 집에서 나갈 시간에 일어났다. 지난 주랑 취침시간이 다를 게 없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영화 '아일랜드'에 나오는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혈당, 호르몬 수치 등을 알려주면서 '앞으로 며칠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피곤할 테니, 휴식을 취하도록 하세요'라는 식으로 권유해 주면 좋겠다. 결과를 통해서 원인을 추론해야 하다 보니 어렵다.
오전 내내 진행된 미팅에서 개발 완료 보고가 끝났다. 개발요청서부터 시작해서 약 1년간 나를 괴롭히던 사항이었다. 유지보수도 있고, 추가 개발도 남은 상황이라 완전히 종결된 거라 볼 수는 없지만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개발의 기역자도 모르는 내가 엑셀로 작업하던 실무를 개발자의 관점으로 바라볼 리가 없었던 터였다. 개발자와 매일 1시간 넘는 통화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종일 미팅을 하며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출해 내는 말도 안 되는 업무를 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S 성향인데, 이 작업을 하면서 N 성향이 될 정도로 상상력을 총동원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실무자와 개발자의 관점은 전혀 다르며, 좋은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얼마나 업무에 시너지를 나타내는지 배웠다. 개발자 관점에서 볼 수 없는 나를 이해해 주는 좋은 분을 만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를 만나 고생하신 거래처 부장님(개발자)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오전 내내 진행된 완료보고를 통해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여주시느라 고생하셨고, 나라는 고집스럽고 지독한 사람을 만나 견적서보다 훨씬 더 많은 개발을 해주셨다. 비싼 걸 사드리고 싶어서 사보텐에 갔는데, (사실은 돈가스 외에는 아무것도 안 팔겠지 하면서 그 핑계로 돈가스를 좀 먹으려고 했는데) 알밥을 팔았다. 결국 알밥.
사보텐은 양배추를 큰 접시에 내줬는데, 식전에 양배추를 엄청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밥을 남겼다. 우동은 면 한 젓가락도 안 먹었다. 하지만 내가 다이어트 중이라도 일본에 놀러 가게 된다면 우동과 라멘을 실컷 먹을 것이다. 그때는 다이어트고 뭐고 일단 없이 많이 먹을 거다.
꼭 일본이 아니더라도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가게 된다면 다이어트는 재껴두고, 내가 사실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기행문을 써봐야겠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야근을 하면 일단 보상휴가로 쌓아주고, 보상휴가를 못 쓰면 익년에 돈으로 계산해서 주는데 나는 지금 한 달을 쉴 수 있을 만큼의 휴가가 있다. 다이어트를 하다가 어느 날 이성을 놓아버리면 휴가를 내고 밥 먹으러 뛰어다닐지도 모른다는 거다.
오후부터 위경련에 이어 장염이 생겼다. 위경련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설과 사님이 나를 찾아왔다. 이게 무슨 일이람. 점심에 먹은 음식에서 탈이 날게 있었나, 요즘 스트레스받았나 여러 방향으로 자꾸 생각해 보게 됐다. 하지만 열심히 생각해 본 보람도 없이 답은 찾지 못했다. 그래도 저녁이 됐다고 배가 고픈걸 보니 많이 심한 건 아닌가 보다 했다. 반공기를 먹고, 다시 반공기를 더 먹었다. 계속해서 '배고파'라고 외쳤다. 결국 밥 한 공기를 넘게 먹고 나서야 나의 배고파 노래는 끝이 났다. 나는 왜 계속 배가 고픈 걸까. 뱃속에 벌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배가 고픈 걸까, 가을이라 구충제를 먹을 때가 됐나.
이 글을 쓰면서 복기해 보니 탄수화물, 그러니까 당을 충분히 섭취하고 만족한 것으로 보였다. 쌓인 피로가 원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생리 2주 전에 식욕조절이 잘 안 되는 경향도 있는데, 마침 부정출혈이 나타나서 그 시기인가 싶기도 했다. 원인은 꼭 하나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나타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다이어트에 기한을 잡지 않았던 것이다. 기한은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데, 나는 그 일정을 따라가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오래도록 써 내려갈 계획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정한 목표에 도달하면, 어느 날 갑자기 이 이야기는 끝이 날 것이다.
출판사 대표님과 인터뷰를 한 내용이 드디어 내 손에 실물로 만져졌다.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인스타그램도 같이 시작했었는데, 그 덕에 소중한 인연을 여럿 만났다. 그중 하나는 '마누스'라는 출판사다. 인스타그램 피드로 접하게 된 출판사의 이미지는 굉장히 솔직하고, 섬세했다. 나중에 내가 에세이를 쓰게 되면 꼭 여기 투고해야겠다,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출판사에 계신 분들을 만나 뵙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고도 하기 전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바라던 일이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이 출판사에서 '마누스 레터'를 발행했고, 그 안에 '마누스가 만난 사람'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나는 '마누스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신청안내를 보자마자 신청했고, 내 마음이 닿았는지 인터뷰이가 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
오래도록 꿈을 그리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가장 오래 그렸던 꿈은 신혼여행이었다. 나는 2001년 포카리스웨트 광고를 보고 '반드시 내 신혼여행지는 산토리니야'라고 마음속으로 정해두었고, 결국 2017년 산토리니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16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2007년 어느 날, '나는 죽기 전에 내 이름으로 쓴 책을 내겠어'라고 다짐했는데, 2022년 공저를 시작으로 15년 만에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나는 '저는 저 부서 IJP(internal job posting)가 뜨면 지원할 거고, 제가 갈 거예요'라고 말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건방지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2022년에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부서로 이동했다.
나는 이제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등의 말을 믿는다. 확신은 또 다른 나를 만든다. 그리고 이제 나는 회사 안에서의 내 모습이 아닌, 회사 밖에서 온전한 나 하나로 서 있는 새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