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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Oct 09.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17

동장대 문석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동장대는 화성에서 유일하게 와장대, 문석대, 영롱장이 있다. 복원된 문석대를 문석대로 부르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보자.


동장대 문석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동장대 앞은 그야말로 화성의 핫 플레이스다. 관광버스가 주차하고, 화성열차의 출발점이고, 연날리기와 전통 활쏘기 같은 재미가 있는 곳이다. 이 일대는 동장대, 동북공심돈, 동북노대, 창룡문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장대는 3개의 대(臺)로 이뤄졌다. 낮은 곳부터 높은 곳으로 하대, 중대, 상대로 부르고 있다. 대(臺)란 건물을 짓거나 어떤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 흙, 잔디, 벽돌, 돌을 이용하여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주변보다 높은 터를 말한다.

동장대에서 가장 높은 곳인 상대(上臺) 뒤쪽에 내탁을 지지하는 문석대(紋石臺)가 있다. 그 위 검은 부분은 영롱장(玲瓏墻)이다.

문석대(紋石臺)는 말 그대로 돌로 쌓은 대인데 쌓은 돌로 아름다운 문양을 표현하였고, 영롱장(玲瓏墻)은 문석대 위에 쌓은 담으로 이 역시 문양을 내어 아름답게 조성한 투시형 담장이다. 와장대(臥長臺), 문석대, 영롱장은 동장대에만 존재하는 자랑거리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건물 앞에서 사진만 찍고 동북공심돈으로 향한다. 혹시 건물 뒤편으로 가더라도 문석대와 영롱장은 스쳐가고, 여장 앞 작은 대포를 보고 신기해한다. 특별히 안내를 하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이러는 이유는, 심한 표현을 빌리자면 문석대와 영롱장이 없기 때문이다. 크기, 형태, 그리고 문양이 전혀 다르게 복원된 것이다.

동장대를 찾은 사람은 대체로 문석대와 영롱장은 그냥 스쳐가고 작은 대포만 보고 동북공심돈으로 가버린다. 

왜 문석대를 없다고까지 표현할까?


첫째, 문석대임에도 문양(紋樣)이 없다.

문석대의 생명은 입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5각과 6각(角) 돌의 디자인이다. 그런데 직사각형 장대석을 이용해 기계적으로 복원했다. 문석대는 쌓으면서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디자인을 완성하고 돌의 선정, 가공, 설치가 이뤄지는 섬세한 작업이다.


둘째, 문석대에 규격(規格)이 없다.

크기와 형태가 완전히 훼손됐다. 지금의 모습은 길이도, 높이도, 형상도 모두 의궤와 다르다. 문석대에 대해 의궤는 "뒤쪽 성체는 활을 편 것과 같이 생겼고, 내탁에 이어 문석대를 쌓았다. 가로길이 136척 세로 너비 20척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석대와 영롱장은 시작부터 주어진 공간에 알맞은 디자인을 하면서 시작된다. 의궤대로 복원하였다면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석재 디자인일 것이다.

반면에 복원된 모습은 당초 너비 20척이 양 끝 부분에서 6척 8촌으로 거의 3분의 1로 줄어든 상태다. 이로 인해 긴 활의 곡률(曲率)을 갖는 둥근 형상은 거의 직선처럼 되었다. 당연히 길이도 짧아졌다. 높이는 영롱장은 더 높게, 문석대는 더 낮게 복원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길이, 높이, 곡률(曲率), 문양(紋樣) 모두가 의궤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즉 비례, 균제, 문양 모두가 사라진 것이다. 문석대와 영롱장은 화성 전체 시설 중 유일한 것으로 와장대와 함께 동장대의 상징이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없애버린 복원은 너무 아쉽다.

현재 복원된 문석대와 영롱장은 길이도, 높이도, 면적도, 곡률도, 문양도, 위치도 당초 의궤와 모두 다르다. 

관련하여 문석대 위 공간은 용도가 무엇일까? 얼마 전 화성 연구가 한 분이 질문한 것이기도 하다.


이 공간에 대해 의궤 설명을 분석하면 "이 공간은 벽돌 여장(甓甎女墻), 투시형 영롱장(玲瓏墻), 층장(層墻)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면적은 120평(坪), 형상은 성의 휜 모습과 같다. 이곳은 문석대 한가운데 돌계단(步石)을 통해 오르고, 정 가운데에 작은 단(小壇)이 하나 놓여있다"로 요약된다.


일반적으로 내탁 상부와 여장은 병사들이 적의 침투를 감시하고 대응 공격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 동장대 뒤 문석대 내탁 공간은 너무나 환경이 다르다. 전면은 아름다움의 극치인 문석대, 영롱장을 설치하였고, 여장은 고급 자재인 벽돌로, 좌우는 층장(層墻)으로 치장하였다. 양쪽 끝에는 절제되었으나 멋진 조경을 하고, 정 가운데는 1척 높이의 작은 단이 놓여있다. 이곳을 오르는 통로도 3계(三階)를 갖추었다.


이렇게 정리하면 어렴풋이 답이 떠오른다.

서노대와 동북노대는 장대를 지키는 시설인데 서노대에는 방대(方臺)가 있으나 동북노대에는 없다. 방대는 노대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는 증거다.

임금이 방문할 경우 임금이 오를 수 있는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그때를 제외하면 동장대에 주재하는 장수가 활용할 수 있는 전망공간, 휴식공간, 연회공간을 조성해 놓은 것이다. 정 중앙 계단을 오르면 놓인 작은  단(小壇)은 전망공간이고, 위아래 공간은 모두 휴식과 연회를 위한 공간이 된다.


건물 뒤편에 만들어진 후원(後園)의 용도라 보면 맞을 것이다. 당연히 인포멀(Informal)한 공간이다. 공식 의례는 당연히 건물 전면(前面)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대호궤도(大犒饋圖)나 동장대 시열도(東將臺試閱圖)를 보아도 공식 의례 장소로 쓰인 곳은 건물 전면의 상대(上臺)였다.

서장대 뒤 서노대 위에 방대(方臺)가 있다. 이는 노대(弩臺) 시설이라기보다 장대에 주재하는 장수(將帥)를 위한 시설이라는 방증이다.

화성에는 팔달산 정상에 서장대(西將臺)도 있다. 두 장대 모두 공통점이 있다. 장수(將帥)가 주재하는 장소이며, 왕이 방문하는 장소이고, 행사나 의례가 진행되는 곳이다. 서장대 전면에 3계(三階)가 있고, 동장대에는 3칸 보석(三間步石)이 있다. 서장대에는 후당(後堂)을 두었고, 동장대에도 보조 공간으로 유난히 큰 규모인 5칸 긴 행랑으로 수직청을 두었다. 서장대에는 서노대가 있다면, 동장대에는 동북노대를 두었다.


서장대 뒤편 서노대 위에는 높이 1척의 방대가 있고, 동장대 뒤편 문석대 위에도 높이 1척의 같은 용도의 소단(小壇)이 있다. 방대와 소단은 똑같은 기능을 하는 시설물이다. 정사각형이라 "방(方)"을 붙인 것이다. 서노대에는 방대가 있는데 동북노대에는 방대가 없다는 것은 방대나 소단은 노대에 필요한 시설이 아니고, 장대의 장수를 위한 시설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문석대 위 소단이나 서노대 위 방대는 장수의 전망공간이란 증거이기도 하다.

동장대 뒤편 문석대 위아래 공간은 장수를 위한 인포멀(Informal) 공간이다.

전쟁 시설물에 영롱장(玲瓏墻)과 문석대(紋石臺)를 설치하고, 휴식과 연회를 위한 공간을 제공해 장수와 병사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려했던 정조(正祖)의 따뜻한 의도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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