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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Oct 02.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16

서1치는 타구를 왜 덮었을까?

화성 8곳 치(雉) 중에 오직 서1치만 타구에 덮개를 하였다. 화성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이유는 무엇일까? 탐험을 시작한다.


서1치(西一雉)는 왜 타구 위를 덮었을까?


의궤에 "적이 성벽에 붙게 되면 우리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을 쏠 수 없게 되고, 상대편의 갈고리나 몽둥이가 이미 성의 밑바탕을 허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좌우로 마주하는 치에서 탄환과 화살이 번갈아 날아온다면 비루(飛樓)나 운제(雲梯)를 어찌 설치할 수 있겠는가"라고 치(雉)의 역할을 설명한다.


이처럼 치의 주 기능은 적의 측면을 좌우 두 군데서 공격함으로 적이 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이다. 치의 기능에 충실하려면 좌우 방어시설 간의 유효거리 결정과, 치의 돌출 길이의 결정이 전략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꿩, 즉 치(雉)는 자신의 몸을 잘 숨기고, 적을 잘 엿보는 장기가 있는 동물이다. 이와 똑같은 장점을 지닌 시설물이라 치(雉)라 이름 지었다.

치에 대해 의궤에는 8개 전체를 공통으로 설명한 후 개별로는 특이한 점만 기록하였다. 개별 내용을 보면 북동치(北東雉)는 북동적대와 붙어있는 점, 서1치(西一雉)는 타구의 위를 덮은 점, 서3치(西三雉)와 남치(南雉)는 여장이 성 안으로 들어온 점을 특별히 설명하고 있다.


"타구(垜口)"란 여장의 한 단위인 타(垜) 와 타가 만나는 부분에 있는 빈 간격을 말한다. 기능으로 설명하면 타는 적으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한 시설이고, 타구는 밖의 적을 엿보거나 사격을 하는 공간이다. 타 와 타구가 없는 치는 상상할 수도 없다. 

복원된 현재의 서1치는 원형과 너무 다르게 복원되어 있다. 타구가 없는 상태이다. 타구가 없는 치가 과연 치일까?

서1치에 올라보니 여장이 평여장(平女墻)이고 총안만 뚫려 있다. 의궤에 언급된 타구는 보이지 않아 의궤와 다르게 복원된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은 성역 당시의 원형과 매우 다르게 복원된 상태이다. 심하게 말하면 지금의 치(雉)는 본래의 기능을 못하는 모양만 치인 것이다.


현재의 모습과 원형을 비교해 보자. 현재는 총안(銃眼) 9개, 타구(垜口)는 없고, 현안(懸眼) 1개가 배치되어 있다. 원형은 총안 15개, 타구 6개, 현안 1개가 배치된다. 현재 상태가 원형보다 총안 6개, 타구 6개가 적은 것이다. 타구는 적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있느냐? 없느냐? 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치의 규모, 즉 돌출 길이와 전면 길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사진은 서3치의 모습이다.

의궤를 풀이해 보면, 원래 서1치의 여장은 성(城)에 설치된 여장과 같은 형상인데, 다만 타 와 타 사이의 타구 위를 벽돌로 덮개를 한 형태라는 것이다. 현재 복원된 상태는 아예 타구 자체가 없는 것이다.


여장에는 여러 과학적 전략적 메커니즘이 숨겨져 있다. 건축물도 없는 하찮은 시설이라고 복원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타구를 없앤 것은 치(雉)의 2대 장점인 자기 몸을 숨기기 잘하고(能藏), 적을 엿보기 잘하는(善伺) 두 기능뿐만 아니라 공격 기능(以便左右射放)도 아예 없애버린 것이 된다. 너무나 아쉬운 복원 오류이다.


왜 타구의 위를 모두 벽돌로 덮었(垜口上亦蓋以甓)을까?

서포루(西砲樓) 앞에서 본 서1치의 모습이다. 남쪽 서포루 능선은 서1치 여장보다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답을 찾아 서1치에 가서 치의 기능을 생각하며 살펴보았다.

먼저, 서1치와 좌우 방어 시설 간 유효거리를 살펴보면, 북쪽으로 70보 거리에 서북각루(西北角樓)가 있고, 남쪽으로 121보 4척 거리에 서포루(西砲樓)가 있다.


다음으로, 서1치의 3방향 성(城) 바깥 지형을 살펴보았다. 동쪽 서북각루 쪽은 아주 완만한 내리막이고, 남쪽 서포루 쪽은 팔달산 정상으로 향하는 오르막 경사면이고, 서북쪽 전면 쪽으로는 맞은편에 높은 숙지산(孰知山)이 있는 형국이다.


끝으로, 서1치 여장 높이로 수평선을 그어 본다. 남쪽 서포루 쪽은 성 밖 팔달산 능선이 서1치 여장 위로 보이고, 전면 건너편 숙지산도 여장 높이 위로 보인다. 우리 병사보다 적의 위치가 더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되는 서1치 만의 독특한 입지(立地)인 것이다. 화성 16개 치(凡八所 其實十六) 중에서 유일한 케이스가 될 것이다. 

서1치에서 북쪽을 보면 서1치 여장보다 높은, 성 밖의 팔달산 능선이 서1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성 밖 주변 지형의 의미는 서1치가 자기보다 더 높은 지형 두 곳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남쪽 서포루(西砲樓) 성 밖 능선에서 서1치까지의 거리는 120보로 활쏘기 과녁 거리 145보에도 못 미치는 거리이다. 전면 건너편의 숙지산(孰知山) 능선도 사정권 내 거리의 위험한 위치이다.


서1치의 여장보다 더 높은 곳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보면 우리 병사는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높이 자체가 방어나 공격에 매우 유리하고 중요한 팩터(Factor)였다. 이런 전략적 요소를 반영한 화성의 시설물도 많다. 문루, 공심돈, 노대, 적대가 바로 높이 자체로 승부를 거는 화성의 시설물이다.

성역의궤와 한글본 정리 의궤 모두 치성도(雉城圖)는 같다. 3면 각각 타구 2개, 총안 5개씩 설치되어 있다.

우리 병사보다 높은 곳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적에 대응하기 위한 보완책이 절대로 필요했다. 바로 타구의 위를 덮는 것이다. 비록 타구 위를 덮는 벽돌 덮개는 아주 작은 시설이지만, 적에게 노출되는 병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효과가 큰 은폐시설이다. 정조(正祖)는 서장대에서 서북공심돈으로 내려오는 도중 서1치 타구 앞에 서서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서 우리 병사를 노리는 적을 상상했을 것이다.


이제는 서1치의 원형을 상상해 보자.

첫째, 원형은 현재의 상태에 3면 모두 각각 2개의 타구와 2개의 총안을 추가한 모습이다. 상하로 길게 뚫린 타구로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도 하고 사격하기도 한다. 비록 타구는 5치의 좁은 틈(闊爲五寸)이지만 양쪽 여장에 벽체에 날카로운 각도를 안팎으로 주어 시야를 수천 배로 확장할 수 있는 신묘한 구조이다. 이것이 복원되니 않은 것이다.

서1치 전면의 여장 위로 숙지산(孰知山)이 있다. 높은 곳에 적이 있는 것 자체가 큰 위협이다.

둘째, 원형은 타구의 윗면을 벽돌로 덮은 모습이다. 타구 위를 폐쇄했느냐 개방했느냐는 우리 병사의 은폐성에 큰 차이가 있다. 타구를 덮은 면적은 비록 작지만, 병사는 우진각 지붕의 크기로 느꼈을 것이다. 심리적 안정감도 최고였을 것이다.


돈(墩)과 포루(舖樓)에서 여장의 타구를 모두 폐쇄형으로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치(雉)의 전략적 본질과 의미를 알고 복원에 임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복원이 잘못된 서1치이지만, 지형 높은 곳과 꺾이는 곳에 위치하여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치(雉)의 시설은 간단하고 미미하나, 성(城)으로 접근하는 적에게는 매우 두려운 존재이다.


서1치(西一雉)의 여장에 아주 작은 벽돌 덮개(蓋以甓)를 설치하여 가성비 최고의 은폐시설을 병사에게 선물한 정조(正祖)의 전략적 의도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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