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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Nov 03.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22

은구(隱溝)로 적군이 통과할 수 있을까?

성 맡에 숨겨놓은(隱) 도랑(溝)을 은구(隱溝)라 한다. 이곳을 통해 적군이 침투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은구(隱溝)로 적군이 통과할 수 있을까?


팔달문에서 팔달산 쪽으로 가면 관광안내소가 있다. 이 옆에 남지(南池) 복원 현장이 있다. 남지를 통과한 물이 성 밑으로 빠져나가 구천(龜川)으로 흘러들어 간다. 물이 빠져나가는 성 밑의 시설, 즉 "성 밑에 숨겨놓은(隱) 도랑(溝)"을 은구(隱溝)라 한다.


문, 수문, 암문과 함께 은구도 성의 안팎이 열려있는 개방형 시설이다. 그만큼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한 조치를 더욱 철저하게 계획하여야 한다. 대문은 옹성(瓮城), 문루(門樓), 적대(敵臺)로 대비하고, 수문은 철전문(鐵箭門), 벽첩(甓堞), 장포(長舖)로 대비하고 있다. 반면에 은구는 폐쇄 시설이 전혀 없다. 그래도 되는 걸까?


은구는 화성에 남은구와 북은구 2곳이 있다. 현재 복원이 되어 있지 않아 의궤 기록인 그림 남은구도(南隱溝圖)를 통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은구도를 보면 기둥간격이 넓어 적군이 쉽게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왜 이리 기둥 사이 간격이 넓을까? 

팔달문 바로 위쪽에 성을 통과하는 물줄기가 보인다. 통과 부분을 은구(隱溝)라 부른다. 물이 나가기 전 연못인 남지(南池)가 보이고 그 위에 남창(南倉)도 있다.

먼저 은구의 규모를 살펴보자. 통과 길이와 높이는 기록에 없고 성의 두께와 기둥 크기로 추정만 할 수 있다. 오직 너비(闊)만 기록으로 남아있다. 의궤 개기(開基)에 "3칸 은구를 만들었는데 은구의 넓이는 4보(步)"라 되어 있고, 도설(圖說) 설명에도 "전체 너비는 4보"라고 같은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구조에 대해 찾아보았다. 의궤에 "원성을 쌓을 자리에 벽돌을 깔고 위에 짧은 돌기둥을 3줄로 세우고 4개의 도랑을 만들었다. 전체 너비는 4 보이고 그 안에 또 은주(隱柱)를 엇비슷이 교차시켜 설치하여 겨우 가는 물줄기만 통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끝으로 자재에 대해 찾아보았다. 의궤 재용(財用) 실입(實入)에 보면 사용된 짧은 기둥인 은구단주석(隱溝短柱石) 37 덩이가 남성(南城)에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규격은 사방 2척에 높이는 2척 2촌이다. 

수원시는 남지(南池)를 복원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남지는 남은구로 물이 나가기 직전에 있는 못이다.

이상의 자료를 정리하면, 은구 너비는 4 보이고, 기둥 배열은 맨 앞줄에 기둥이 3개, 두 번째 줄이 4개로 교차 배열로 되어 있고, 기둥 규격은 사방 2척이고, 기둥 설치는 45도 각도로 틀어 세웠다.


적이 침투할 수 있을까?


침투자에게 가장 불리한 곳인 기둥 4개인 곳을 계산해보자. 사방 2척의 정사각형 기둥을 45도 틀어서 놓았으므로 사실상 기둥면은 너비가 2척 8촌이 된다. 따라서 기둥 4개 기둥이 차지하는 전체 너비의 합은 11척 2촌으로 3.47m이다. 은구의 너비 4보는 4.71m가 된다.


4.71m에서 기둥이 차지하는 면을 빼면 1.24m가 물이 흐르는 도랑이 된다. 이 폭을 물이 흐르는 개소로 나누어 보면, 양쪽 끝의 기둥과 벽 사이는 각각 15cm이고, 가운데 기둥과 기둥 사이는 30cm가 된다.  

의궤 도설(圖說)에 기록된 그림 은구도(隱溝圖)이다. 기둥 간격이 넓어 적군의 침투가 우려된다.

30cm는 사람이 통과하는데 매우 힘든 간격이다. 더욱이 기둥이 3개, 4개가 교차로 배치되어 있어, 미꾸라지처럼 몸을 S커브로 계속 틀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은 틀림없다.


한마디로 적군이 쉽게 통과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의궤에도 "겨우 가는 물줄기만 통하게 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정말로 다른 장치도 없이 "물 샐 틈만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장치 없이 이런 완벽한 구조가 된 핵심 설계는 무엇일까?


기둥을 2가지 점에서 특별히 설계를 했다. 하나는 앞줄에는 3개 다음 줄에는 4개 그 다음 줄에는 3개를 세워, 앞의 빈 공간에 다음 줄 기둥을 세우는 식으로 교차배치를 하였다. 다른 하나는 정사각형 기둥을 45도 각도로 틀어서 설치한 점이다.

남은구는 성 안의 물을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성 밑에 설치한 도랑이고, 북은구는 성 밖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 들여오는 도랑이다. 사진은 북지(北池) 터이다.

교차 배치한 것은 최소의 재료로 최대한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한 설계이다. 교차배치는 적이 통과하는데 몸을 계속 비틀게 만들어 통과를 저지하는 효과를 얻는다. 또한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올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기둥을 45도 틀어서 세운 것은, 같은 규격으로 저지하는 면을 1.4배 늘리는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 기둥 면 62cm가 자연스레 87cm로 늘어나는 셈이다. 기둥을 바로 세울 경우로 계산해 보니 침투 공간이 56cm가 된다. 45도로 틀어서 배치한 경우의 30cm보다 거의 2배나 빈공간이 넓어지는 것이다.


45도로 돌려 뾰족한 부분이 앞쪽으로 가면 흐르는 물에 섞여있는 이물질이 걸리는 것도 방지된다. 북수문에도 물이 들어오는 북쪽 홍예 사이의 돌(扇單石)을 뾰족하게 해 놓은 것도 같은 이물질 방지를 위한 설계이다. 

화홍문 북쪽 두 개의 홍예가 만나는 하부 돌을 앞쪽을 뾰족하게 하였다. 물과 함께 내려오는 이물질이 덜 걸리게 하려는 조치이다.

그런데 계산과 그림 은구도가 왜 안 맞을까? 은구도 그림을 보면 사람이 쉽게 드나들 정도로 기둥 사이가 넓게 보인다.


이유는 의궤 그림의 제작의도와 작도 방법에 따른 왜곡이다. 은구도(圖)는 조감도 형식의 그림이면서 치수가 완벽히 반영되지 않은 형식이다. 정보를 쉽게 전달하려는 목적을 우선하였기 때문에 스케일(Scale)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은구(隱溝)설계에 같은 규격이라도 기둥을 45도로 틀어 세우고, 같은 수량이지만 기둥을 교차 배치하였다. 이는 같은 공사비라도 물의 흐름에는 유리하고, 적(敵)의 침투에는 불리하게 작용하도록 한 깊은 지략이 담긴 설계이다.


물 샐 틈만 주고, 적군은 통과할 수 없게 설계한 은구(隱溝)의 기둥 배치에서 정조(正祖)의 지략과 섬세한 계획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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