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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Jul 25. 2022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100

영화역(迎華驛)은 왜 동북쪽 성 밖에 설치했을까?

영화역(迎華驛)은 왜 동북쪽 성 밖에 설치했을까?


의궤에 화성의 국면을 "만년의 금성탕지(金城湯地)"로 평가하고 있다. 방어하기에 좋고 안전한 화성(華城)이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취약하고 적에게 유리한 곳도 있다. 팔달산(八達山) 남쪽 능선, 숙지산(孰知山), 구산(龜山), 선암산(仙巖山) 4곳으로 판단된다. 공통점은 성 밖인 점, 성과 가까운 위치인 점, 그리고 터가 성보다 높은 점이다. 화성으로는 눈 엣 가시 같은 곳이다. 


당시에도 대책을 마련하였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는 용도(甬道)를 설치했고, 구산과 숙지산에는 돈대(墩臺)를 세웠다. 모두 성 밖에서 매복, 척후, 경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선암산만 어떤 대책도 없었다는 점이다.   


선암산 대책으로, 화성 연구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선암산에도 용도(甬道)나 돈대를 설치해야 했다는 것이다. 왜 선암산에 용도나 돈대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선암산은 동북공심돈 밖 맞은편 산을 말한다. 현재 화성(華城)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거의 붙어있다. "퉁소바위 전설"이라면 누구나 아는 곳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의 애틋하고 슬픈 전설이 있는 장소다. 

화성과 선암산 능선에 왜 용도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화성 연구가들 대부분의 의문이다.

선안산(仙巖山)에 올라보니 화성 전체가 조망된다. 그야말로 적이 점거하면 화성 전체의 허실이 모두 파악될 수 있는 곳이 확실하다. 주변을 살펴보니 용도(甬道)가 설치되어 있다면 효과가 다소 있겠으나, 지형은 용도를 설치할 곳이 아닌 곳으로 판단된다.


성역 당시의 지형 상태는 성역의궤와 한글본 뎡니의궤에 있는 화성전도(全圖)를 통해 알 수 있다. 확인 결과, 화성과 선암산 사이 능선이 푹 꺼져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런 지형은 용도 터로 기본 조건에 맞지 않는다. 용도 터는 사방이 용도보다 낮아야 하고, 구간 전체가 수평이어야 한다. 용도는 높은 성이 아니고, 낮은 담장이기 때문이다.


만일 주변에서 1곳이라도 용도보다 높은 곳이 있다면 용도 안을 모두 볼 수 있게 된다. 만일 수평이 아니고 오르락내리락한다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모두 볼 수 있다. 매복(埋伏)과 척후(斥候)라는 기능을 할 수 없고, 거꾸로 적이 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통로로 이용될 수 있다. 

선암산에 오르면 화성의 전모를 조망할 수 있다. 사진은 8부 능선 정도에서 찍은 것이다.

그렇다면 선암산을 적에게 내어주자는 말인가? 전략가 정조에겐 어림없는 얘기다. 정조(正祖)의 숨겨진 대안을 찾아보자.


첫 번째 대책은 동북공심돈 배치다. 

선암산 바로 맞은편에 동북공심돈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북노대와 동장대를 배치하였다. 셋 다 모두 최강의 전력(戰力)이다. 동장대는 대규모 병력이 있는 곳이고, 동북노대는 쇠뇌를 쏘는 임무 외에도 경보의 역할도 맡겼다.


동북공심돈은 남공심돈, 서북공심돈을 지으며 알게 된 약점을 보완한 가장 현대화된 공심돈이다. 경사로를 설치하여 포탄과 병력의 층간 이동이 안전하고 신속해졌다.


동북공심돈을 선암산 맞은편에 배치한 가장 큰 이유는 원형으로 설계된 공심돈이기 때문이다. 총혈 40개, 포혈 23개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원형으로 설계하여 360도 어느 방향이던 사각지대(死角地帶)가 생기지 않는다. 즉 선암산 전체를 맞춤형으로 감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북공심돈은 원형으로 감시 사각지대(死角地帶)가 없고 선암산에 맞춤 대응하도록 세웠다.

두 번째 대안은 영화역(迎華驛) 설치다. 가장 강력한 대책이다.

의궤 권 1 절목(節目)에 정조는 "동성 밖(東城之外)은 인가가 드물고(人家鮮少), 산등성이가 가로질러 길게 뻗어있고, 광교산의 깊은 계곡과 지름길이 염려되므로 영화 찰방을 설치(當慮迎華察訪設置)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양재역(良才驛)을 옮겨 선암산 인근에 영화역(迎華驛)을 설치하였다. 대규모 역참(驛站)이 들어서자 모텔, 택시, 유흥 주막, 24시 편의점과 인가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영화역 인근은 많은 인가와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뉴타운 형성은 첫째, 영화역 본연의 신속한 경보 전달은 당연하고, 둘째, 마을 사람들 전체가 척후, 정탐, 경보의 역할을 하게 되고, 셋째, 마을 자체가 선암산을 적의 은밀한 침투로에서 개방된 동네 뒷산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이 정조의 의도였다.


당시의 전투나 전쟁은 적군이 화성을 향해 오고 있다는 상황까지는 이미 인지한 상태에서 치르는 형태이다.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고, 왜구가 동래에 상륙한 후 몇 주일이 지나야 화성에 도달하는 형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척후, 정탐, 경보 등이 매우 중요했다.


정리하면, 당시 선암산은 용도(甬道)를 설치할 지형으로 적합하지 않았다고 결정했다. 대안으로 정조는 영화역을 설치하여 뉴타운을 형성시켜 척후, 정탐, 경보 기능을 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은밀한 적의 침투로를 공개된 장소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정조는 양재역(良才驛)을 화성으로 옮겨 영화역(迎華驛)을 세웠다. 역참 인근에 순식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끝으로 남는 의문은 왜 간단한 돈대(墩臺)조차 세우지 않았을까? 왜 가까운 선암산에서 돌을 캐어 쓰지 않았을까?이다.


답은 "퉁소바위 전설" 때문이다. 

퉁소바위 전설이 깃든 선암산에 대한 정조의 생각을 엿보자. 아무리 선암산의 돌과 땅이 필요해도 전설을 훼손하여 생길 재앙(災殃)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전설 속 노부부의 형상을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고, 화성에 "퉁소바위 전설"을 영원히 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나는,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아주 작은 구산(龜山)에는 돈대를 설치했으나, 구산보다 훨씬 큰 선암산에는 돈대를 지을 손바닥만큼의 땅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같은 암산(岩山) 임에도 숙지산과 여기산에서는 돌을 채취했으나, 선암산에서는 일체의 암석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산은 화성에서 4km, 숙지산은 2km인데 반해, 선암산은 150m이다.

왼쪽 앞에 보이는 바위가 선암산의 할아버지 바위고, 오른쪽이 북 중학교 뒤 할머니 바위다.

창룡문 근처에 가시거든 꼭 선암산에 올라, 온전하게 남아있는 할아버지 퉁소바위와 건너편 할머니 퉁소바위를 보자. 그리고 영화역과 뉴타운을 상상해 보면, 정조의 전략과 마음이 보일 것이다. 


선암산을 건드리지 않고, 적의 침투를 막을 환경을 주변에 조성한 것이다. 높이 솟아 화성 전체의 허실을 엿볼 수 있는 선암산에서 "영화역 뉴타운"을 설치한 정조(正祖)의 전략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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