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99
의궤 화성전도(華城全圖)를 보면 특이한 시설이 눈에 띈다. 동장대 맞은편, 방화수류정 성안 쪽, 우화관 담 밖, 강무당 앞에 있는 시설이다. 굵고 높은 나무가 쌍으로 세워져 있다. 서장대와 동장대에 세워진 위간보다 간격은 좁고, 높이는 높다.
궁금했는데 2019년 화성연구회 학술회의에서 이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12폭 화성도(華城圖) 병풍도"에 대한 연구발표에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이 한 쌍의 나무는 과녁인 솔(帿)을 걸어두는 "솔대"라는 것이다. 위치도 화성의 활터 4곳에 있다는 내용이다.
4곳은 득중정(得中亭), 강무당(講武堂), 방화수류정, 동장대이다. 득중정에는 건물 앞 정면에 북쪽을 향해 사대(射臺)가 있고, 동장대도 지휘소 건물 오른쪽 처마 밑에 사대가 있다. 강무당과 방화수류정은 월대를 사용한 것 같다. 위치는 4곳 활터와 일치한다.
답은 "아니오"이다. 4가지 측면에서 아니라는 이유를 제시한다.
과녁 높이는 조선시대 무과 경우 6척 6촌이었다. 그러나 몇 번에 걸쳐 크기가 커져서 지금은 8척 8촌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당시 규격을 미터법으로 보면 가로 1.4m, 세로 2.0m이다.
이에 비하면 병풍 화성도에 나오는 솔과 솔대는 너무 높고 크다. 물론 의궤 그림은 설명을 이해하기 쉽도록 일부를 강조하고 스케일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점을 감안해도 너무 차이가 난다.
병풍 화성도에 나오는 솔대는 땅에 붙박이로 고정시킨 구조다. 그런데 당시 과녁은 이동식 구조였다. 득중정 어사도(御射圖)나 대사례도(大射禮圖)에 보면 분명히 이동식이다. 뉘었다 세웠다 하고, 들어서 다른 곳이나 보관 장소로 옮길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솔이 모두 나부끼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과녁은 4면이 휨이나 구부러짐이 없이 평탄함을 유지하고 있다.
병풍 화성도에 나온 표시를 보면 위쪽에 리(離) 괘가 그려져 있고, 아래에 세로 장방형(長方形) 관(貫) 표시가 있다. 과녁 기준은 괘 표시는 없고, 정방형(正方形) "관(貫)" 모양이다. 크기도 기준이 훨씬 작다. 물론 현재는 원형(圓形)도 쓰인다.
아래 규정은 "은깎지 활쏘기 학교" 교두 정진명의 "과녁의 모양 변천"에 나온 글에서 갖고 왔다. 조선시대 무과의 과녁은 크기가 가로 4척 6촌, 세로 6척 6촌이었다. 과녁을 가로세로 3등분 한 후 정 가운데 네모를 검정으로 칠하여 이를 "관(貫)"이라 하였다. 그래서 정 가운데를 맞추면 "관중(貫中)"이라 한 것이란다.
사대에서 과녁까지 거리는 120보로 145m가 기준이었다. 하지만 늘 이 거리에 과녁을 놓고 활쏘기를 한 것 같지 않다. 득중정 어사도를 보아도 행궁 담장까지 거리는 80m 정도이다. 또한 사대와 과녁 사이에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화살이 나가지 못하거나, 민가나 백성에 위험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득중정(得中亭) 솔대는 정면인 북쪽에 과녁이 위치한다. 그러나 정북 방향에서 30도 정도 우측으로 쏠려있다. 이 방향각으로는 화살이 낙남헌 건물에 막히게 된다. 거리는 180m 정도이다.
강무당(講武堂) 솔대는 정면인 동쪽에 과녁이 위치한다. 우화관 끝나는 곳까지 거리는 150m 정도이다. 방화수류정 솔대는 월대와 직각인 남쪽에서 약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거리는 30m에서 60m로 중간값은 45m이다.
동장대(東將臺) 솔대는 동장대에서 동1포루로 향한 방향에 위치한다. 동1포루 아래 신설된 차로까지로 거리는 250m이다. 이곳까지 방향각으로 보면 화살이 동장대 건물에 막힌다.
이런 특징들은 솔대가 과녁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사대와 과녁의 방향각은 화살이 건물에 막히는 점, 사대와 솔대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고 120보가 넘는 점, 솔이나 솔대가 과녁 기준보다 몇 배가 큰 점, 솔대 주변에 만가나 도로가 있는 점이다.
무엇보다 과녁 위치가 아닌 곳으로 보이는 곳에도 솔대가 있다. 동장대 사대가 지휘소 건물 동쪽 처마 밑에 있다. 민가 등 장애물이 없고 120보 거리가 확보되는 곳은 사대 정면으로 동북공심돈 방향이다. 그런데 동1포루 쪽에 솔대가 설치된 것은 솔대가 과녁이 아니란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 솔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록을 찾지 못해 추정할 뿐이다. 먼저, 솔대의 위치에 주목했다. 모두 화성 활터 4곳과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다음, 솔대의 높이에 주목했다. 높이가 서장대, 동장대의 위간과 유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위간의 용도는 무엇인가? 위간은 화성에서 군사가 무엇을 할 건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군사와 백성에게 알리는 표시 깃발을 걸어두는 깃대이다. 이런 이유에서 유사한 형태인 솔대도 활터에서 활을 쏘고 있다는 안내 표시 또는 조심하라는 경고 표시로 본 것이다.
검증을 해보자. 화성도에서 솔대 주변을 살펴보았다. 득중정 솔대 뒤에는 도로와 민가가 있다. 강무당 솔대 뒤에도 관청인 이아(貳衙)와의 사이에 민가가 있다. 방화수류정 솔대 뒤에도 민가가 있다. 동장대에는 솔대 앞으로 백성이 빈번히 다니는 창룡문으로 통하는 큰 도로가 있다.
솔대 모두 백성이 기거하는 민가와 백성이 이용하는 도로가 앞 또는 뒤에 설치되어 있다. 이래서 솔과 솔대는 과녁이 될 수 없고, 활쏘기를 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시라고 보는 것이다. 요즈음 "전광판"이라 할 수 있다.
정조(正祖)는 활을 잘 쏘았다. 화성(華城) 행행 때마다 수원 지역 백성을 위해 특별 무과 시험으로 인재를 발탁했다. 화성 사대(射臺)에 올라 과녁을 바라보며 정조의 기개(氣槪)를 엿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