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강웅 Jun 26. 2022

覘正祖之道 : 정조를 엿보다-96

화성은 정약용이 설계했을까?

화성은 정약용이 설계했을까?


남도 여행 중 강진(康津) 다산 박물관을 방문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은 큰 도움이 되었다. 화성 얘기도 있었다. "정약용(丁若鏞)의 설계로 수원 화성이 지어졌고, 거중기를 발명하여 몇 만 냥 절약되었고, 공사기간도 10년에서 3년으로 단축시켰다"란 내용이다.


하시는 일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과장은 당연하지만, 화성과 관련해서는 허풍이 태풍급이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3가지가 모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산(茶山) 정약용이 화성성역에 끼친 영향이나 기여도가 매우 미미하다고 보는 편이다. 


과연 다산(茶山)은 화성에 무엇을 남겼을까? 다산은 화성 축성 기본계획인 "성설(城說)"과 "도설(圖說)"을 화성에 남겼다. 


먼저, 성설(城說)과 도설(圖說)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성설"은 정약용이 만든 화성 축성 기본계획이다. 계속해 옹성, 포루, 현안, 누조, 기중에 관한 도설을 작성한다. 이 중 "성설"만 "어제성화주략"이란 이름으로 발표된다. 어제란 말이 붙어있듯 임금이 직접 만든 것으로 발표되고, 이는 화성 성역의 지침이 된다.


그리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공사가 끝난 후 성역과 관련된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한 공사 보고서다. 공사에 관한 최초의 의궤다. 내용은 사업 개요, 시일(時日, 일정), 좌목(座目, 조직), 도설(圖說, 설계도서), 재용(財用, 공사비), 그리고 관련 문서이다.


성설 내용과 성역의궤를 비교하며, 과연 다산의 기본계획이 실제로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평가할 예정이다.

다산은 화성의 규모를 3,600보로 계획하였으나 실제로 28% 늘어난 4,600보로 끝냈다.

첫째, 성의 규모인 푼수(分數)에 관한 계획이다. 

다산은 화성의 규모를 3,600보(步, 4.2km)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한 규모는 4,600보(5.4km)였다. 성 높이도 2장 5척(7.8m)으로 계획하였으나, 실제로는 등가 평균 1장 7척(5.2m)으로 쌓았다.


계획보다 길이는 1,000보, 높이는 8척이나 차이가 발생했다. 비율로는 각각 28%, 32%의 차이다. 건설공사에서 이런 차이는 엄청난 변경이다. 규모관리부터 실패했다.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다.


둘째, 성 밖에 설치할 해자(垓子), 즉 호참(濠塹)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방어에 좋은 해자의 설치를 계획했다. 해자를 팔 때 나온 흙을 성의 내탁부에 쓸 수 있어 일거양득이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사방에 자연적으로 깊은 도랑(自然深溝)이 있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 사업비 관리, 일정관리, 품질관리 모두를 놓친 것이다. 이 역시 좋은 평가를 줄 수 없다. 


해자는 물을 가두어야 하므로 대체로 평지성에 설치한다. 화성은 평지성이 30%도 안 된다. 무엇보다 계획한 성 밖에 개울이 있는지 없는지 현지 조사를 해야 했다. 해자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고 현지 조사 한번 없이 계획을 세운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 밖에 연속된 구덩이에 물을 채운 것을 해자 또는 호참이라 한다. 적의 접근을 막는 시설이다. 사진은 낙안읍성 호참이다.

셋째, 성(城)의 견고한 기초(基礎)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기초에 대해 너비를 1장, 깊이는 4척, 재료는 "큰 돌을 사용하면 공사비가 많이 드니 수원부 개천가의 흰 자갈을 쓰면 된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실제 공사는 자갈을 쓰지 않고 큰 돌을 모두 길게 떠서 이를 성과 직각으로 배열하여 깔았다. 더구나 그 밑에는 두툼한 박석을 1겹에서 3겹까지 깔았다. 공사비가 두려워 원칙을 벗어나는 우(愚)를 범한 것이다. 실무 경험이 없는 다산에게 좋은 평가를 줄 수 없다. 


넷째, 성을 쌓는 재료(材料)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흙, 벽돌, 돌 중 돌을 선택하였다. 벽돌을 제척 한 이유는 땔나무 구하기가 어렵고, 제작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곳에 벽돌도 사용했다. 옹성, 벽성(甓城), 포루(砲樓), 공심돈, 봉돈이다.  


돌로 시공이 안 되는 것도 벽돌로 하면 쉽고 공기도 단축되는 곳에 주로 사용했다. 무엇보다 재료를 두 종류로 하면 석공과 벽돌공, 돌과 벽돌로 이원화되어 인력수급과 공기단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산은 종합적 판단이 부족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부족했다. 

다산은 화성을 석성으로 계획했다. 의외로 화성에 벽돌을 많이 사용했다. 사진은 북암문 좌우의 벽돌 성이다.

다섯째, 돌을 운반하는 수레 만들기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돌의 운반을 중요하게 보고 유형거(遊衡車)를 발명하여 제시한다. 유형거는 튼튼한 바퀴, 돌을 싣고 내리기가 편하고, 앞뒤 균형으로 힘이 덜 드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실제 투입된 수량을 보면, 대차(大車) 8대, 평거(平車) 76대, 유형거 1대, 발차(發車) 2대, 동차(童車) 192대가 투입되었다. 수레를 끄는 소(牛)의 마릿수를 보면, 대차가 40마리, 평거 5마리, 유형거 2마리, 발차 1마리가 끈다. 우력(牛力)과 투입대수(輛數)를 종합해 보면 운반에서 유형거의 비중은 메우 작았다.


여섯째, 성을 쌓는 방법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성을 쌓을 때 아래로부터 3분의 2까지는 안쪽으로 1층(1단)에 1치(寸)씩 들이밀고 나머지 3분의 1은 바깥쪽으로 3푼(分)씩 내미는 형상으로 쌓으라고 제안했다. 


실제로도 다산의 계획을 따랐다. 구조적으로도, 시각적(美的)으로도 수준 높은 성 모습이 되었다. 비록 함경도 경성(鏡城)을 벤치마킹했다 할지라도 다산의 제안 중 가장 잘 한 계획으로 평가한다. 


일곱째, 채석장 인근에서 돌을 대충 다듬으면, 부피와 무게가 줄어 운반에 유리하다는 제안이다. 실제로 치석소(治石所)를 채석장 인근에 설치하여 계획대로 운영하였다. 좋게 평가한다.

다산은 돌 운반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유형거(遊衡車)를 발명했다.

여덟째, 석산과 공사장 사이의 가설도로에 대한 계획이다. 

공사 전 만들고, 가능한 한 직선으로, 그리고 평평하게 만들라는 제안이다. 실제로 멀지만 북성 밖에서 흙을 가져왔다. 곧고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기존 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산의 계획은 3개 항을 제외한 나머지 중요한 5개 항은 채택이 안 되거나 대폭 변경되었다. 더구나 제안하는 형식을 보아도 의아하다. 덜 중요한 부분이 분량은 더 많다. 성화주략 원문 전체 분량에서 유형거, 해자, 기초 3개 항이 전체 분량의 77%이다.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뒤바뀐 구성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첫째, 건설의 기초지식이 결여된 계획이었다. 둘째, 사전에 현지 조사를 하지 않은 계획이었다. 이는 치명적 약점이 되었고, 실무 경험이 배어있지 않은 "계획을 위한 계획"일 수밖에 없다. 결론은 화성성역에 도움이 안 된 기본계획이라 평가한다. 아마 다산에 대한 평가는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의 "기본계획"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내용을 보면, 다산이 만든 "기본계획"은 기본계획도, 개념설계(Concept Design)도, 계획설계(Schematic Design)도 아니다. 설계 이전의 설계지침(Design Criteria)이 가장 적합한 용어다. 당시의 건설 프로세스가 이를 증명한다. 

성을 쌓는 방법으로 아래로부터 3분의 2까지는 안쪽으로 들이밀고  나머지 부분은 바깥쪽으로 내미는 모양을 제안했다. 수준 높은 제안이다.

당시에는 설계자가 따로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장인(匠人)과 감동(監董)이 설계, 시공, 감리, 모두를 실행하는 시스템이었다. 다산의 "기본계획"은 앞으로 성역에 참여할 감동과 장인에게 제공되는 지침 혹은 제안서였다.  따라서 "정약용이 화성을 설계했다"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시에는 설계를 완료한 후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와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시스템이었다. 모든 공사가 패스트트랙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공사 전 설계도면도 없었다. 정약용이 설계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그런데 정조는 왜 기본계획을 만들고 공표하였을까?


정조의 "어제성화주략"에 답이 있다. "그 방법이 비록 개략적인 것이고 전문적인 견해는 아니라(雖得糟粕) 할지라도, 거기에서 얻는 이익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益且不淺)"라는 맺음말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수득조박"과 "익차불천"이 키워드이다. 


"겨우 조박을 얻었지만"이란 "수득조박(雖得糟粕)" 표현에서 다산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엿보인다. 이 말에는 "다산의 노력, 지식, 논리, 진취성은 높이 사지만, 실무경험이나 전문성은 아직 부족하다"는 정조의 아쉬움이 배어 있다. "조박"이란 술을 두 번이나 짜내고 남은 찌꺼기인 술지게미를 말한다.


"이익이 적지 않다"란 "익차불천(益且不淺)" 표현에서 화성성역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엿보인다. 이 말에는 "아무리 작아도, 화성성역에 보탬만 된다면 그 어떤 지푸라기라도 쓰겠다"는 정조의 처절한 마음이다.    

정약용의 "화성 설계"는 사실상 없었다. 

오늘은 화성 축성의 기본계획인 다산(茶山)의 "성설(城說)"을 살펴보았다. 정리하면, 다산이 만든 "기본계획"인 "성설"과 "도설"은 요즘 말하는 설계가 아니다. 설계를 위한 설계지침(DC)이 가장 적합한 용어다. 당시의 건설 프로세스가 증명해 주었다. 


외로운 입장에서, 다산과 함께, 화성을 착수하고자 했던 정조(正祖)의 고뇌(苦惱)를 엿보았다.

작가의 이전글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9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