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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Jun 21. 2022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95

정약용은 기본계획 작성 전 현지조사를 했을까?

정약용은 기본계획 작성 전 현지조사를 했을까?


1794년 1월 15일 정조는 팔달산 정상부터 수원을 돌며 성터를 확정한다. 이때 최초 계획인 "3,600보 화성"의 깃대 표시를 보고 여러 지적을 한다. 이는 의궤 권 1 연설(筵說)에 기록되어 있다. 연설이란 임금이 자문하고 신하가 답한 기록인 것이다. 이 중 정조의 지적을 찾아보고 함께 그 속에 담긴 뜻을 살펴보자.


첫 번째로 "깃대가 북쪽 마을을 지나가니, 인가(人家)가 많이 훼철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이 말에는 성이 될 주변의 인가에 대한 철거, 이주, 신축을 감안하여 지적한 것이다. 공사비와 공사기간 등 경영측면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북성 전체에서 철거한 민가가 초가 18호뿐이었다. 반면에 북성 길이의 반도 안 되는 남성에서 철거한 초가가 20호나 되었다. 무엇보다 백성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정조의 마음이 숨겨져 있다.


두 번째로  "성(城)이 거의 행궁의 담장처럼 보인다(殆若墻面)"라는 지적이다.


자칫 행궁만을 생각한 지적이라 오해할 수 있는 말이나 사실은 화성부의 미래 확장성을 둔 말이다. 실제로 이 지적으로 화성 경계를 북쪽으로 넓혀 화성부의 면적은 2배나 확장되었다. 정조는 화성을 상업 도시, 농업 도시, 군사 도시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미래 화성부(華城府)"에 대한 포석이다. 

최초의 3,600보 성 모양은 서1치에서 창룡문 옆 동1포루까지 직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로  "깃대 세운 것을 가늠하여보니 성 밖으로 나갈 인가가 꽤 많을듯하다(人家之當 出城外者)"라고 지적한다.


공사비가 늘고 공사기간이 길어져도 가능한 많은 민가를 성안으로 끌어들이라는 말이다. 정조는 관리가 아니라 백성과 함께하는 화성을 원했다. "관청(官廳)의 성"에서 "민가(民家)의 성"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성은 관리가 사용하는 면적이 대부분이었으나, 화성은 민가가 차지하는 면적이 대부분이다.


네 번째로 "용연(龍淵) 위에 우뚝 솟은 용두(龍頭)는 정기와 신령함이 있으니 그 위로 성을 쌓으라"라고 지적한다.


높은 바위 위는 방어에 유리하다. 좌우에 위치한 화홍문과 북암문은 특히 방어에 취약한 시설물이다. 이 두 시설물을 방어하는데 유리한 높은 바위 언덕 용두를 성안으로 품은 것이다. 물막이 역할로 재해 방지에 유리한 것은 덤이었다.


다섯 번째로 "내문성에 석성을 쌓고, 외문성에 따로 토성을 쌓아 내문성을 보호하려는 뜻은 알겠다. 그러나 내 뜻은 외문성에만 성을 쌓는 것이 좋다"라고 지적했다.


이 말에는 2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을 이중으로 쌓아 공사비와 공사기간을 이중으로 투입하는 문제를 없애려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토성은 방어에 신뢰할 수 없는 구조일뿐더러 장기적으로 유지관리비가 많이 든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용연 위 용두(龍頭)를 감싸 성을 쌓는 것이 좋다고 지적했다. 용두는 화홍문을 지키는 요충지이다.

여섯 번째로 "성터의 남북 간 거리가 너무 가깝다(南北相距 亦爲太近) 이것은 먼 미래를 경영하는 도리가 아니다(非經遠之道)"라는 지적이다.


이 지적은 지금의 화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지적이다. 최초의 "3,600보 화성"은 전체 형태가 도시의 형태에 맞지 않는 형상이다. 더구나 평지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 것이 문제였다. 평지성은 산상성에 비해 성 높이가 1.25배이고, 내탁 크기도 커서 공사량이 산상성의 2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는 일자문성(一字文星)에서 외문성(外文星)으로 연결하여 성을 쌓도록 지시했다. 결과 당초보다 평지성 비율이 41%에서 30%로 줄어들었다. 전체 1,000보를 늘렸는데도 공사비와 공기는 오히려 줄었다. 미래 확장성을 보고 성을 늘렸지만 공사비와 공기는 줄이는  "신의 한 수"였다.


필자는 정조의 지적을 보고 의문이 생겼다.  정약용은 기본계획을 작성하기 전 현장조사를 했을까? 지적 내용과 변경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내문성에서 외문성(外文星)으로 성의 루트를 바꾸었다. 바꾼 덕분에 사진 속의 각건대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정약용은 기본계획 작성 전 현지조사를 했을까?


답은 "하지 않았다"이다.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 정조의 질문은 현지조사까지 할 필요가 없는 수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본계획인 "성설(城說)"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어제성화주략" 제1항인 푼수(分數) 3,600보는 무엇인가? 에 대해 생각해보자. "성설"과 같은 기본계획 규모는 사업 초기단계의 수치이다. 한 예로, "년 1,00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는 비료공장을 짓는데 땅이 얼마나 필요합니까?"라는 공장주의 물음에 대한 답과 같은 개념이다. 이는 사업 초기단계의 수치로 대규모 국책사업의 큰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규모로 보면 된다.  


예를 들면 "행궁과 인가(人家) 1,000호(戶)를 품을 수 있는 성의 규모는 얼마면 되겠느냐?"라는 건축주 정조의 물음에 다산은"성 둘레가 3,600보(步) 라야 계획한 바에 들어맞습니다(可以苟用)"라고 답한 것이다.


둘째, 정약용의 언급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설"에 "일찍이 수원부에 있는 개천가를 본 적이 있는데(嘗見府內川邊)"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상견(嘗見), 즉 "일찍이 가본 적이 있다"라는 말은 이번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간 적이 있다는 표현이다. 유배나 외직으로 갈 때 수원을 지나며 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데도 한 화성 연구가는 "다산의 구상은 팔달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산등성을 타고 내려와서"라고 마치 답사한 것처럼 구체적 지형과 방위를 저서에 표현하고 있다. 

기본계획의 3,600 보라는 규모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업 초기 단계에서 본 규모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본계획 3,600보 규모"는 실제와 차이가 있어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다산의 기본계획은 정조의 질문에 매우 정확한 답을 낸 것이다. 차이가 생긴 것은 정조의 "웅대한 화성에 대한 꿈"까지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속 웅대한 화성은 바로 "정조의 4,600보 화성"이었다. 오늘은 "성설(城說)"이나 "어제성화주략"의 규모 계획에 대한 정체성도 살펴보았다.


정조(正祖)에겐 백성 사랑, 미래 확장은 속마음이고, 더 깊은 속마음에 공사비, 공사기간, 방어전략 같은 "경영(經營)"과 "실용(實用)"이 있음을 엿보았다. 다음 편에는 "정약용은 화성을 설계했을까?"를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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