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문답] 문루(門樓) 1층에 왜 큰 마루를 놓았을까?
화성에는 대문 4곳, 수문 2곳, 암문 5곳으로 11곳의 문(門)이 있다. 성(城)에는 가능한 한 문이 적어야 하는데, 화성은 문이 많기로는 챔피언이다. 인근 도시 백성과, 그리고 성 안팎 백성 사이에 소통을 중시한 성이라 할 수 있다.
대문(大門)은 삼남(三南)과 한양, 그리고 광주, 용인, 안산, 남양과 소통하는 통로였다.
수문(水門)은 수원천 좌측과 우측에 있는 민가를 소통시키는 백성의 다리였다.
암문(暗門)은 숨겨놓은 문이 아니라 성 밖 백성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개방된 최단거리 통로였다.
수원 화성은 성을 따라가다 문을 만나도 옹성이나 문루를 그대로 통과할 수 있다. 문루에 들어서면 커다란 마루가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가운데에 널찍이 깔려 있어 피해서 지나가려면 통로가 좁아 불편하다. 창룡문과 화서문은 통과할 공간이 없어 아예 마루 위에 가설통로를 만들어 놨다.
이렇게 넓은 마루를 왜 깔아놨을까?
이유는 마루 밑 부분은 사실상 허공과 같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마루 아래 부분의 구조를 살펴보자.
대문에는 출입문과 문루를 설치하기 위해 인공지반을 만들어 놓았다. 성 안팎을 따라 돌(武砂石)로 쌓고 그 안에는 잡석(雜石)을 넣고 다지며 성(城) 높이까지 올린 것이다. 이것을 육축(陸築)이라 부른다.
한가운데를 비워서 사람은 물론 말이나 수레가 다니는 통로를 만들었다. 통로는 안쪽과 바깥쪽에 홍예(虹蜺)를 틀고, 그 사이는 돌로 벽을 쌓았다. 따라서 통로 위 부분은 사실상 뻥 뚫린 상태(사진 참조)가 된 것이다.
이렇게 뚫린 부분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양쪽 벽 위에 나무 널을 걸쳐 하늘이 보이지 않게 막았다. 이 허공을 덮은 나무 널판을 "덮을 개(蓋)" 자(字)를 붙여 "개판(蓋板)"이라 부른다.
통로에서 올려다 보이는 개판 아래 면에는 용(龍)이나 구름(雲氣, 운기)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개판 위 면에는 회삼물(灰三物)을 깔았다.
그림을 그리고 회삼물을 깐 이유는 의장(意匠) 효과와 시설물의 위계(位階)를 구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개판 재료인 목재를 부패, 습기, 이끼, 벌레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개판의 위 부분도 아래 부분과 마찬가지로 방수, 방습, 방부 등 자연현상과 벌레들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개판 위에 회3물(灰三物)을 깔은 것이다.
"회삼물"이란 석회, 황토, 고운 모래 3가지를 같은 비율로 섞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두께 4촌(四寸, 13cm)을, 창룡문과 화서문은 3촌(9cm)을 깔았다.
문제는 개판과 회삼물이 철근 콘크리트 슬래브처럼 견고한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한 미장(美匠) 바름과 다름없다는 점이다. 이 말은 비상시 그 위에 많은 사람이 동시에 다니거나, 무기 등 물건을 쌓아 두면 무너질 수 있는 구조라는 의미다.
어떻게 하면 다수의 병사가 뛰어다녀도 안전한 구조가 될까?
이에 대한 대책으로 개판 위 부분을 모두 마루로 덮은 것이다. 이래서 안전을 위해 설치한 것이라 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는 마루의 위치, 마루의 크기, 마루의 결구(結構) 방식을 보면 명확해진다.
첫째, 마루 위치는 개판 바로 위 부분이다. 이것은 마루 설치가 개판을 덮기 위한 목적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마루 크기는 개판 면적보다 크게 하였다. 개판보다 모두 2척 2촌씩 더 크게 했다. 개판 부분이 완벽히 덮여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마루 전체가 직접 기둥 6개에 접합된 결구(結構) 방식이다. 마루가 개판에서 1척이 떠있는 완전히 분리된 구조로 했다. 마루의 자중(自重)이나 마루 위의 적재하중(積載荷重) 일체가 기둥을 통해 지반으로 전달되도록 했다. 그 어떤 하중도 개판으로 전달될 수 없는 구조이다.
정리하면, 문루 1층 큰 마루는 공간 활용보다 그 아래의 있는 홍예 개판의 불안전한 구조를 차단하는 안전장치이다.
한여름 무더운 날 문루 마루에 앉아있으면 남태평양 피서지가 부럽지 않다. 조상의 체취도 느껴진다.
마루를 설치한 이유를 알게 되니 문루를 지날 때 느꼈던 불편함도 이해가 된다.
안전을 도모하고, 공간으로도 활용하였을 문루 마루를 통해 정조(正祖)의 안전 의식과 부하 사랑을 엿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