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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Nov 23.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25

왜 벽등(甓磴)을 쌓았을까?

동북포루는 포루 중 유일하게 벽등(甓磴)이 설치되어 있다. 왜 벽등을 설치했을까? 화성 미스터리 중 하나다.


왜 벽등(甓磴)을 쌓았을까?


포루(舖樓)는 포루(砲樓)와 우리말로 같아 꼭 한자를 병용해야 하는 시설물이다. 포루(舖樓)는 보병이, 포루(砲樓)는 포병이 사용하는 시설물로 구분하면 쉽다. 의궤의 설명은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舖)라 한다"라 하였다. 적을 염탐하고 방어하는 병사들이 적에게 직접 보이지 않도록 집을 지어 놓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舖樓)가 있는 데, 이 중 동북포루, 즉 각건대는 방화수류정이나 용연에서 동쪽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해넘이(日沒)를 감상하는 포인트로 알려져 주말에는 수많은 젊은 연인들이 동북포루 안팎에 몰려든다. 

동북포루는 요즈음 선셋 포인트로 소문이 나 전국의 젊은 연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포루는 화성에서 위계가 낮은 시설물인데, 동북포루는 "동산루(東山樓)", 후에 "각건대(角巾臺)"란 별칭을 부여받은 점, 벽등(甓磴)을 설치한 점, 치(雉)에 벽돌을 사용한 점, 지붕에 용두(龍頭)를 설치한 점 등 특이한 점이 많다. 참 수상한 놈이다. 이 중 벽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벽등은 왜 설치했을까?


우선 벽등은 어떤 구조인지 살펴보자. 의궤에 "여장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重築甓磴)"라는 기록이 있다. 쉽게 말해 여장과 집 사이 빈 공간을 벽돌로 꽉 채운 것을 벽등이라 보면 된다. 재료가 벽돌(甓)이고, 길보다 바닥이 높아(磴) 벽등(甓磴)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동북각루 아래 용연(龍淵)도 젊은 연인들의 피크닉 장이다. 소풍 가방, 풍선, 작은 탁자, 커피 등과 함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왜 이 공간을 벽돌로 채웠을까? 바닥면적이 너무 커서 집과 치 사이의 빈 공간을 처리하기 위해서일까? 이런 의문으로 화성 5곳 포루의 규모를 살펴보았다. 서포루가 75척 6촌으로 가장 크고, 북포루와 동1포루가 65척, 다음이 동북포루로 61척, 가장 작은 규모는 59척인 동2포루다.


동북포루는 5개 포루 중 평균(65척)에도 못 미치고 끝에서 두 번째 크기로 작은 규모로 나타난다. 이로 보아 구조나 외형적 요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벽등에 대한 설명으로 의궤에 "높이는 난간 바닥에서 그치며 벽등 아래위에 네모난 총안 19개와 누혈 11개를 뚫어놓았다"라 하였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내용은 첫째, 벽등의 높이가 집의 바닥 난간 밑까지(高止欄底)라는 점이고, 둘째, 총안(銃眼)을 벽등 위아래에 뚫은(上下鑿方眼) 점이다.


이 두 가지가 벽등의 비밀을 풀 열쇠이길 바란다.  

바닥 난간 밑까지가 벽등의 높이인데 벽돌 5매 높이만큼 낮다. 과연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첫째, 왜 벽등의 위아래에 총안(上下鑿方眼)이 필요했을까?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위아래"란 말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위아래"에 함축된 의미는 다른 포루와 비교하여 2배의 병력과 화력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포루는 여장에 1줄의 총안이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동북포루는 위아래에 총안이 설치되어 2배의 병력을 가동할 수 있는 구조다. 한 팀은 벽등 위에서 여장을 방패 삼아, 다른 한 팀은 벽등 아래에서 벽등을 방패 삼아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구조로 만든 것이다.


둘째, 높이는 왜 "바닥 난간 밑까지(高止欄底)"로 했을까?


더 낮게도 아니고 더 높지도 않은 "난간 바닥 밑까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바닥 난간 밑까지"는 2가지 면에서 벽등 높이의 최적 설계이다. 하나는, 더 낮으면 벽등 아래에서 총을 쏠 수 없게 되고, 더 높으면 벽등 위에서 병사가 여장에 몸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바닥 난간 밑까지"가 벽등의 최적 높이이자 한계 높이인 것이다.   

벽등 아래에서도 적을 염탐하고 총을 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병사들의 이동과 배치에서 최적의 높이라는 의미이다. 벽등은 높아서 오르기 힘든데 무슨 최적의 높이냐 하실 것이다. 비상시 많은 병사가 동시에 작은 출입문으로 나가 좁은 계단으로 내려간 후 다시 높은 벽등에 오른다는 것은 전투 시설물로는 있을 수 없는 구조다.


이런 문제점을 정조(正祖)는 그대로 두지 않았다. 집(舖) 안에 대기하던 병사가 출입문으로 나가 내려간 후 다시 벽등에 오르는 혼잡한 동선(動線)을 없애버린 것이다.


3면에 모두 있는 판문을 열고, 여장으로 한 번에 나갈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집 안에서 벽등 위로 병사들이 발을 디딜 수 있게 해야 한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최적의 벽등 높이가 바로 "난간 밑 높이"인 것이다.


벽등이 계단 없이 오를 수 없는 높이인데도 당초부터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병사들이 벽등을 오를 필요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집에서 벽등 위로 직접 나가는 방안을 처음부터 설계하였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면 출입문은 전체 병력의 2분의 1 정도인 벽등 아래 근무자만 이용하게 되어 비상시 출입도 원활해진다.  

서쪽으로 용연, 북암문, 화홍문, 북동포루가 바로 아래로 보인다. 동북포루 입지는 전략적으로 최고의 위치다.

결론적으로 벽등은 주어진 좁은 공간에 화력과 병력을 2배로 늘려주고, 유사시 길고 혼잡한 전투배치 동선을 10분의 1로 줄여주는 신묘(神妙)한 구조이다.


다만 복원 상태가 의궤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 복원된 벽등 위 높이가 최적 높이 "난간 밑"보다 50cm가 낮게 되어있다. "난간 밑까지"라는 중대한 의미가 무색한 복원이다. "난간 밑까지"의 의미를 모르고 한 복원이다.


왜 벽등 높이를 난간 밑과 일치시키지 못했을까?


단면 기준을 정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필자의 예상으로는 치성 따로, 목구조(建物) 따로, 토목 따로, 각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공사에서는 본질을 실현시키기 위해 조정(Coordination)과 통합(Integrated)이 필수이다. 본질을 꿰고 있던 성역 당시의 감동당상(監董堂上) 조심태(趙心泰)와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씨가 필요한 지금이다. 귀신이라도 괜찮다.   

동북포루의 벽등은 화력과 병력을 2배 늘리고, 유사시 복잡하고 시간이 소요되는 동선을 10배 줄인 신묘한 구조이다.

가파른 지형, 비좁은 땅, 여러 불리한 조건에도 필요한 기능을 담아낸 지혜에 감탄할 뿐이다. 벽등(甓磴) 하나를 추가함으로 2배의 공격력과 10배의 신속함을 실현한 동북포루의 벽등에서 정조(正祖)의 지략(智略)과 설계의도를 엿보았다.


지면 관계로 여러 포루 중 왜 하필 동북포루에만 벽등을 설치했을까?는 다음 편으로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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