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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Nov 25.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26

정약용(丁若鏞)과 토사구팽

화성 기본계획을 만든 정약용이 건설에는 일체 참여하지 못했다.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사진은 수원 화령전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이다.


정약용(丁若鏞)과 토사구팽


1791년 정조가 홍문관 수찬(修撰)인 정약용에게 화성을 위한 새로운 성제(城制)를 연구할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화성성역은 출발한다. 기존의 장단점과 중국의 강점은 물론, 중국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반영하여 1년 후 성곽 계획안을 완성하여 정조에게 보고한다.


계획안은 임금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성역의 기본지침이 되었다. 바로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다. 이 성화주략은 성역의궤(城役儀軌)는 물론,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와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도 수록되어 있다.


의궤 권 2에 "어제(御製)" 항목이 있는 데도 굳이 권 1 맨 앞에 실은 것은 "성화주략이 전체 책의 한마루(宗旨)이고, 여러 권에서도 으뜸(冠冕)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범례(凡例)에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성화주략을 "종지(宗旨, 중심 가르침)", "관면(冠冕, 면류관)"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중요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정약용에 의해 마련된 화성의 전모다. 이 전도(全圖)에 보이는 실제 완성 규모는 기본계획보다 25% 정도 늘어난 것이다.

기본계획이 완성되고 2년 후 1794년 정월에 착공을 한다. 이후 성역은 1796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진행된다. 공사 기간 동안 정약용은 성균관, 홍문관, 우부, 규장각, 병조에 근무한 것으로 되어있다. 의궤 어디에도 정약용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화성에 대한 기본계획 수립과 공사 착수를 살펴보며 지울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방대한 연구를 통해 기본계획을 세운 정약용이 화성성역에 참여하지 못했을까? 화성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본인이 피한 것일까? 아니면 배제당한 것일까?


본인이 의도적으로 피한 것은 아니다.

여유당전서에 기록된 일화다. 정약용이 지방 근무지로 가는 길에 화성을 지나며 옹성 위에 설치된 오성지(五星池)를 보게 되었다. 당연히 본인이 고안하고 설계한 시설이다. 겉모양은 같았으나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만들어 기능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를 보고 다산은 "도본(圖本)만을 보고 공사를 하니 '그림책을 뒤져서 천리마 찾는 격이다'라고 한탄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정약용은 화성의 기본계획을 세웠고, 가장 정통했다. 그런데도 성역에 참여한 기록이 없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탄까지 할 정도면 정약용은 자신이 계획한 화성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본인 스스로 화성성역을 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타인에 의해 배제당한 것이 된다. 바로 정조에 의해서다.


정조는 왜 정약용을 화성에서 배제했을까?


지금까지의 설은 부친의 사망과 천주교 연루 모함 사건을 화성 공사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부친의 사망은 1792년으로 착공 2년 전이고, 천주교 연루 모함 사건도 1795년으로 착공 후 1년 반이 지나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시기적으로 정약용의 배제와는 관련성이 희박하다.


외적 요인이 아니면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 된다.


정약용은 정조의 추가 지시로 옹성(甕城), 포루(砲樓), 현안(懸眼), 누조(漏槽), 거중(擧重)에 관한 도설(圖說)을 보완한 바 있다. 그야말로 화성에 대해 당시로는 가장 많이, 그리고 깊이 파악하고 있던 신하였다. 정조가 인정하는 신하였다.

정약용은 추가로 옹성, 포루, 현안, 누조, 거중에 대해 보완하였다. 그야말로 화성에 대해 가장 많이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정조는 정약용을 왜 배제했을 까? "화성성역"과 "건설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인식과 관점을 파악해야 정조의 마음도 읽을 수 있다.


첫째, 화성성역에 대한 정조의 인식을 보자.

정조는 영부사(領府事) 채제공(蔡濟恭)에게 화성성역 총책임자를 추천하라 하였다. 채제공은 조심태(趙心泰)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조심태를 2인자인 감동당상으로, 채제공을 1인자인 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그 이유로 "일의 체모가 중대하니, 채 영부사가 총괄하여 살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조가 화성성역을 일개 공사가 아닌 대규모 사업으로 보았다는 의미다. 


또한 정조는 화성의 성터를 보고 "만년의 금성탕지(金城湯池)로구나" 할 정도로 화성성역을 전쟁 군사시설이라는 인식을 철저하게 갖고 있었다. 이런 인식에서 경영능력, 축성(築城) 경험, 수성(修城) 경험, 그리고 군사 식견을 갖춘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역의 핵심조직은 총리대신, 감동당상, 도청, 책응도청이다. 임명 당시 총리대신(總理大臣) 채제공은 73세의 영부사였다. 감동당상(監董堂上) 조심태는 53세로 어영대장이었고, 도청(都廳) 이유경은 금위중군으로 46세 나이였다. 

정약용이 계획한 수원 화성이 야경이다. 점점이 선으로 이어진 것이 화성의 일부다.

이에 비해 당시 정약용은 31세로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나이, 직위, 성역 경험, 군무 경력, 군사 경험, 경영능력 등이 총리대신, 감동당상, 도청을 맡기기에는 부족하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정조의 객관적 평가이다.


둘째, 건설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인식을 보자.

정조는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건설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중 정약용은 설계자다. 정조는 설계자에게 건설감독의 임무를 주는 것이 화성 성역에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 즉 전략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설계자가 감독을 하면 설계의도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설계에 충실한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잘못 설계된 것, 현장과 동떨어진 것, 개선해야 할 것 등이 발견되더라도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우려해 당초 설계를 밀어붙이는 단점도 있다.

동북공심돈도 군무 경력과 군사 식견이 있는 감동당상과 도청이 있었기에 공심돈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공심돈이 되었다.

이와 달리 설계자는 아니지만 성(城)을 시공했거나, 관리한 경험이 있거나, 군사를 운용해 본 실무 경험자가 감독하면 설계의 수정, 보완, 개선을 수행하는 데 유리하여 높은 완성도를 이뤄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정조는 "전쟁 군사시설", 그리고 "높은 완성도" 두 가지 모두를 원했다. 이를 위해 설계자가 아닌 자로 감독을 하는 시스템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설계자인 정약용을 배제한 것이다. 그것도 완벽히 배제하였다. 한마디로 정조의 전략적 판단이다.


이 두 가지 면에서 보면 토사구팽으로 볼 수 없다. 정조는 정약용이 여러 모함을 받을 때마다 지방 근무나 유배를 보냈다. 이는 처벌이 아니라 보호와 배려였다. 잠잠해지면 곧 불러들여 자리(職)를 주고 승진도 시켜왔다. 흔히 알고 있는 장기간의 유배생활은 정조가 죽고 1년 후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애정은 깊었다. 

정약용이 화성성역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정조의 객관적 평가와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결과이다.

정리하면 정약용이 화성성역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개인 사정, 개인 의지, 외적 요인이 아니고 정조(正祖)의 객관적 평가와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결과이다.


그 결과 수원지역 근무경력, 축성(築城) 경험, 수성(修城) 경험, 군무(軍務) 경력이 있는 감동당상과 도청을 임명하여 석산(石山) 발굴, 민원 해결, 조직 안정, 자금 조달, 그리고 시설물에 많은 개선과 향상으로 최고의 완성도를 이루어 낸 것은 사실이다.


정약용(丁若鏞)의 발탁과 배제를 통해 정조(正祖)의 객관적, 전략적 양면(兩面)의 조직경영(Human Resources Management)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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