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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May 24. 2021

覘正祖之圖:정조를 엿보다-52

퉁소바위 전설(傳說)과 영화역(迎華驛)

가장 현대화된 동북공심돈과 가장 높은 동북노대를 왜 저 자리에 배치했을까? 선암산을 마주한 까닭이다


퉁소바위 전설과 영화역(迎華驛)

[ 선암산에는 왜 용도(甬道)가 없을까? ]


의궤에 화성의 국면을 "만년의 금성탕지(金湯之地)"로 평가하고 있다. 방어하기에 좋고, 안전한 화성(華城)이란 말이다.


하지만 취약한 곳도 있다. 팔달산(八達山) 남쪽 능선, 숙지산(孰知山), 구산(龜山), 선암산(仙巖山) 4곳으로 판단된다. 공통점은 성 밖이고, 성과 가까이 있고, 성보다 높다는 점이다. 화성으로는 눈 엣 가시 같은 곳이다. 


그래서 당시에 이미 대책을 마련하였다. 팔달산에는 용도(甬道)를 설치했고, 구산과 숙지산에는 돈대(墩臺)를 세웠다. 모두 성 밖에서 매복, 척후, 경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선암산만 어떤 대책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성의 국면은 방어에 유리하고 안전한 금성탕지(金湯之地)의 형국이다. 그래도 취약한 지역은 있다.

선암산 대책으로, 화성 연구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선암산에는 용도(甬道)를 설치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왜 선암산에 용도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선암산은 동북공심돈 밖 맞은편 산을 말한다. 화성(華城)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거의 붙어있다. "퉁소 바위 전설"이라면 누구나 아는 곳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의 애틋하고 슬픈 전설의 장소다.


선암산에 올라보니 화성 전체가 조망된다. 그야말로 적이 점거하면 화성 전체의 허실이 모두 파악될 수 있는 곳이 확실하다. 주변을 살펴보니, 용도가 설치되어 있다면 다소 효과가 있겠으나, 지형은 용도를 설치할 곳이 아닌 곳으로 판단했다.


용도를 설치할 곳이 아닌 이유에 대해 지형적인 면과 시공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화성과 선암산 능선에 왜 용도(甬道)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화성 연구가들 대부분의 의문이다.

먼저, 지형 측면에서 본 이유이다.

성역 당시의 지형 상태를 확인해야 판단할 수 있다. 자료는 성역의궤와 한글본 정리의궤에 있는 화성전도(華城全圖) 뿐이다. 병풍도는 성역 이후 제작된 그림이므로 검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확인 결과, 산(山)의 맥이 연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능선은 양쪽 사이 가운데가 많이 내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암산 봉우리에서 상당 부분 내려간 후 다시 성터 쪽으로 오르는 형상이다. 즉 화성과 선암산 사이 능선이 푹 꺼져있다는 말이다.


이런 지형은 용도를 설치할 지형 조건에 맞지 않는다. 용도 터의 2가지 기본 조건은 첫째, 사방이 용도보다 낮아야 하고, 둘째, 구간 전체가 수평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용도란 높은 성이 아니고, 낮은 담장이기 때문이다.


만일 4면 중 1면이라도 주변이 용도보다 높다면, 용도 안을 모두 드려다 보게 된다. 만일 수평면이 아니고 오르락내리락한다면 내려간 부분은 올라간 부분에서 모두 보일 것이다. 매복(埋伏)과 척후(斥候)라는 용도의 주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거꾸로 공격 대상이 될 것이다.

선암산에 오르면 화성의 전모를 조망할 수 있다. 사진은 8부 정도에서 짝은 것이다.

이 기준을 팔달산 용도 터에 대입해 보자. 팔달산 용도는, 사방이 모두 용도보다 낮고, 바닥은 전 구간이 수평이다. 그야말로 용도 터(址)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선암산은 용도를 설치하면 안 되는 터이다.


다음으로, 시공 측면에서 본 이유이다.

만일 이런 지형에도 불구하고 용도를 꼭 설치하려면 둘 사이의 푹 꺼진 지형을 인공적으로 수평으로 만들어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흙을 다져가며 쌓아 높인 후 용도를 설치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만리장성처럼 높게 성을 쌓는 방법이다.  


당시 공사 여건은 삽, 굉이, 우마차, 인력(人力)만을 사용해야 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흙을 쌓아 산을 만든다거나, 돌로 산 높이만큼 쌓는 것은 시공과 사후 안전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결론적으로 선암산 용도는 당시 여건으로는 시공성(施工性)이 없다고 당시에 판단했을 것이다. 

한글본 정리의궤 화성 전도(華城全圖, 왼쪽)에서 화성 터와 선암산 능선이 수평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병풍도(오른쪽)에서 검증도 하였다.

종합하면, 지형조건이 용도를 설치할 기본 조건에 미치지 못하고, 공사 여건으로는 조건에 맞는 지반을 만드는 것도 시공성이 없기 때문에 용도를 설치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앞의 지형 조건이 더 중요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선암산을 적에게 내어주자는 말인가? 전략가 정조에게 어림없는 얘기다. 

정조(正祖)의 숨겨진 대안을 찾아보자. 


첫 번째 대안은 영화역(迎華驛) 설치다. 

의궤 권 1 절목(節目)에 "동성 밖(東城之外)은 인가가 드물고(人家鮮少), 산등성이가 가로질러 길게 뻗어있고, 광교산 깊은 계곡과 지름길이 염려되므로 영화찰방을 설치(當慮迎華察訪設置)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영화찰방은 영화역을 관리하는 책임자의 직책 이름이다.  


이에 따라 말죽거리 양재역(良才驛)을 옮겨 선암산 인근에 영화역(迎華驛)을 설치하였다. 대규모 역참(驛站)이 들어서자, 모텔, 택시, 유흥 주막, 편의점과 인가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영화역 인근은 많은 인가와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뉴타운 형성은, 영화역 본연의 신속한 경보 전달은 물론이고,  첫째, 마을 사람들 전체가 척후, 정탐, 경보의 역할을 하게 되고, 둘째, 마을 자체가 인근 선암산을 적의 은밀한 루트에서 동네 뒷산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이 정조의 의도였다.


당시의 전투나 전쟁은 적군이 화성을 향해 오고 있다는 상황까지는 이미 인지한 상태에서 치르는 형태이다.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고, 왜구가 동래에 상륙한 후 며칠이 지나야 화성에 도달하는 형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척후, 정탐, 경보 등이 매우 중요했다.

정조는 양재역(良才驛)을 화성으로 옮겨 영화역(迎華驛)을 세웠다. 역참 인근에 순식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두 번째 대안은 동북공심돈 배치다.

선암산 맞은편에 동북공심돈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북노대와 동장대를 배치하였다. 셋 다 모두 최강의 전력(戰力)이다. 동장대는 대량의 병력이 있는 곳이고, 동북노대는 쇠뇌를 쏘는 임무 이외에도 경보의 역할도 맡겼다. 절목 "기계(器械)"에 동북노대에 배치할 경보를 위한 기구 목록이 증명한다.


동북공심돈은 남공심돈, 서북공심돈을 지으면서 알게 된 약점을 보완한 가장 현대화된 공심돈이다. 경사로를 설치하여 포탄과 병력의 층간 이동이 안전하고 신속해졌다.


동북공심돈을 선암산 맞은편에 배치한 가장 큰 이유는 원형으로 설계한 공심돈이기 때문이다. 총혈 40개, 포혈 23개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원형으로 설계하여 360도 어느 방향이던 사각지대(死角地帶)가 생기지 않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선암산 전체를 맞춤형으로 감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 결론은, 당시 선암산은 용도를 설치할 지형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결정하였다. 대안으로 정조는 영화역을 설치하여 뉴타운을 조성하여 척후, 정탐, 경보 기능을 할 수 있게 했고, 은밀한 침투로를 공개된 장소로 바꾸어 버렸다. 또한 공심돈을 원형으로 설계하여 선암산에 맞춤형으로 대응하도록 조치했다. 

동북공심돈은 원형으로 감시 사각지대(死角地帶)가 없고, 선암산에 맞춤 대응을 하도록 세웠다.

그래도 남는 의문이 있다. 왜 간단한 돈대(墩臺)조차 세우지 않았을까? 왜 가까운 선암산에서 돌을 캐어 쓰지 않았을까?이다.


필자는 "퉁소 바위 전설"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소설 같은 주장이라 말씀하실 것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팩트(Fact)를 제시하며,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려 한다. 


첫째, 아주 작은 구산(龜山)에도 돈대를 지었는데, 선암산은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돈대를 지을 손바닥만큼의 땅도 일체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 숙지산(孰知山)과 여기산(如岐山) 채석장은 화성에서 2km, 4km인데, 150m 거리의 아주 가까운 암산(岩山) 선암산에서는 봉우리에 노출되어 있는 바위조차 일체 건드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셋째, 십여 년 전 수원시에서 선암산에 전망타워 건립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왼쪽 사진에 보이는 바위가 선암산의 할아버지 바위고, 멀리 녹색 부분에 할머니 바위가 있다. 오른쪽도 북중학교 뒤 할머니 바위이다.


정조(正祖)는 아무리 선암산의 돌과 땅이 필요해도, 전설(傳說)을 훼손하여 생길 재앙(禍)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돌을 벌석(伐石)하여 전설 속 노부부의 형상을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화성에 퉁소바위 전설(傳說)을 영원히 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창룡문 근처에 가시거든 꼭 선암산에 올라, 눈앞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할아버지 퉁소바위와 건너편 할머니 퉁소바위를 보자. 그리고 영화역과 뉴타운을 상상해 보고, 화성 쪽 동북공심돈과 동북노대를 바라보자. 정조(正祖)의 마음이 보일 것이다. 


선암산을 직접 건드리지 않고, 주변에 적의 침투를 막을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높이 솟아 화성 전체의 허실을 엿볼 수 있는 선암산에서, "퉁소 바위 노부부 전설"을 대하는 정조(正祖)의 마음을 엿보았다. 


[52회 1년 발행을 되짚어 보며]

이번 글이 연속 번호 52번이다. 

1주일에 글 1편씩이니 만 1년이 되었다. 

매년 새해에 1년에 하고 싶은 1가지를 정해왔는데, 작년 1월 1일에 정한 것이 내 고향 수원화성에 대한 글쓰기였다. 


솔직이 여행기도 아니고 너무 건조하고 딱딱한 내용이라 읽으시는 분들에게 마음의 부담이 컸다.

다만 화성에 대해 그동안 모르던 것과 잘못 알려져 왔던 것에 대해 많은 해소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까지 스스로와의 약속은 지켰고, 앞으로 얼마만큼 갈지는 잘 모르겠다.

하는 데까지 해 볼 예정이다.

"The Show must go on" 계속 사랑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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