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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May 31.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53

북동적대와북동치는왜 붙었을까?


북동적대에서 90도로 성이 꺾이고, 북동치와 붙어 있다. 화성 미스터리를 밝혀보자.


왜 북동적대에서 90도로 꺾었을까?

왜 북동치(北東雉)와 붙었을까? 


성(城)을 설계할 때, 산상성 설계는 아무래도 지형지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평지성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의 평지 위에 설계하기 때문에 조상의 설계의도, 전략, 미의식(美意識)을 숨김없이 볼 수 있게 된다.


평지성인  장안문 좌우의 적대에서 서쪽과 동쪽의 성 모양을 보면 감탄만 나온다. 바닥에서도 구불구불하고, 서있는 모습도 구불구불하다. 작거나 가벼운 재료도 아닌 육중한 수천 개 돌덩이로 이런 형상을 만들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좌우 적대 중 동쪽 북동적대(北東敵臺)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하나는 성이 이곳에서 90도로 꺾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동치(北東雉)와 한 몸으로 붙어있는 점이다. 꺾이는 곳에서 두 시설물이 붙어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왜 하필 북동적대에서 90도로 꺾었을까? 왜 두 시설물이 붙어있을까? 화성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둔탁하고 무거운 돌로 화성의 변화무쌍한 선(線)과 면(面)을 만들었다. 화성은 수원에 세워진 하나의 설치미술이다.

오늘은 독자 여러분이 과거로 돌아가 임금(王)과 감동당상(監董堂上)이 되어 장안문부터 방화수류정까지 전 구간을 직접 설계하실 예정이다. 성곽 설계란 어느 위치에, 어떤 시설물을 배치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설계 과정을 따라가면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이 꺾인 이유부터 찾아보겠습니다.

1단계로, 북문과 동북각루의 위치를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화성성역 착공 직전 정조는 책임자를 임명하고, "수원에 가서 기본계획과 같은 규모로 성터를 잡아 말뚝을 박아(立標定基) 놓으라" 지시합니다. 이후 정조는 수원에 내려가 표시된 성터를 직접 확인하며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 남북 간 거리가 좁으니 북문을 더 밀어내라. 둘째, 동북쪽은 내문성을 성 안에 품고 외문성(外文星)에 성을 쌓으라, 셋째, 용연(龍淵) 위 바위 산도 둘러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지적에 따라 북문을 한양 길을 따라 더 북쪽으로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장안문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지적대로 용연 위에 동북각루(방화수류정)를 배치합니다. 이렇게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위치도 결정된 것입니다. 


이상이 장안문과 방화수류정의 설계 과정입니다. 이 두 시설물의 설계는 왕명(王命), 즉 발주자 지시에 의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 북문(장안문)부터 동북각루(방화수류정)까지 화성을 설계하여야 한다. 그 설계 과정을 따라가 보자.

다음 2단계로, 두 시설물의 바로 옆 시설물을 설계합니다. 

적대와 수문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왜? 적대이고, 수문이 되어야만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적대는 제도에 따라 설계합니다. "적대는 문에서 70보(步)를 떨어져 좌우에 각각 설치한다"라는 중국 제도에 따라 배치합니다. 이것이 북동적대(北東敵臺)의 설계 과정입니다.


그리고, 방화수류정 옆으로는 수원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병사와 백성이 마음껏 다닐 다리(橋)가 필요하고, 흐르는 물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수문(水門)으로 결정됩니다. 앉을자리는 전략적 설계 기준으로 결정됩니다. "공격 위주의 시설물은 성 밖으로 돌출시키고, 방어 위주의 시설물은 성 안으로 당겨 배치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공격성 시설물은 성 밖으로 돌출되어야 성으로 접근하는 적의 옆구리를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어 위주의 시설물은 성 안으로 약간 들여야 적이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들어가기만 해도 양쪽에서 공격당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이 자리에 서서 용연 위 용두에 동북각루, 즉 방화수류정을 배치하라는 지시를 한다.

적의 입장에선 성 안으로 한발 물러선 수문 앞의 공간이 마치 "악마의 목구멍(Diablo's Throat)"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북수문(北水門)의 설계 과정입니다.


다음 3단계는, 적대와 북수문 사이에 원성(元城)을 설계합니다. 


원성이란 시설물 사이의 성이므로 그냥 북동적대와 북수문을 연결하면 성이 되는 것입니다. 연결해 보니 성이 북동적대에서 90도로 꺾이게 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설계가 지극히 정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옛 제도와 설계 기준을 적용한 설계의 결과일 뿐, 의도적으로 90도로 꺾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북동적대와 북수문 사이의 원성의 설계 과정입니다. 아울러 첫 번째 의문 "왜 북동적대에서 90도로 꺾었을까?"의 답, 즉 이유입니다.


다음, 북동치와 붙은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다음 4단계는, 북동적대와 북수문 사이에 시설물을 설계합니다.

이것이 끝나야 장안문과 방화수류정 구간의 설계가 모두 완료되는 것입니다.

북수문, 즉 화홍문은 방어 위주의 시설물이어서 성 안으로 들여와 배치했다. 꺾여 들어온 성 뒤에 병사를 배치해 접근한 적을 몰살시킬 수 있다.

우선, 이 사이에 시설물 몇 곳을 설치해야 하는가를 결정합니다.

이 구간의 직선거리를 재어보니 290m로, 환산하면 246보(步)가 됩니다. 의궤에 "치(雉), 대(臺), 포(舖)의 간격은 비슷하다(步武略同)"라는 옛 제도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평지성에서 시설물 간 배치 간격을 계산해 보니 평균 134보(步)입니다. 이것을 적용하여 1곳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음, 어떤 시설물로 설계해야 하는가를 결정합니다.

정약용은 기본계획인 포루도설(砲樓圖說)에 "화성에 포루(砲樓)는 북문 좌우에 각각 1, 남문 좌우에 각각 1, 장대의 남쪽에 2, 서문의 남쪽에 1"를 세우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포루(砲樓)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동적대와 북수문 사이에는 "1곳", "포루(砲樓)" 배치로 결정된 것입니다. 이것이 북동포루(北東砲樓) 설계 과정입니다. 


당시 설계과정을 보니, 옛 제도나 설계 기준을 잘 적용했고, 설계 순서도 선후를 잘 지켰다고 봅니다. 건축물은 유형마다 고유의 설계 순서가 있습니다. 많은 한국의 설계자는 모르거나, 안 지키거나 합니다. 

북수문(화홍문)과 북동적대 사이는 옛 제도에 따라 1곳만, 화성 기본계획에 따라 포루(砲樓)가 결정되었다. 사진은 북동포루.

끝으로, 전체 구간의 문제점을 찾아보겠습니다.

다음 5단계는, 완료된 설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합니다.


역시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성(城)이 북동적대에서 90도(度)로 꺾이는 데 따라 북동적대 방어에 구멍이 생긴 것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적대의 최대 방어 범위를 넘게 되어 무방비 지역이 생긴 것입니다. 안으로 꺾인 90도는 바깥 각도로 270도가 되고, 이 270도가 북동적대의 담당해야 할 방어 범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성의 최대 방어 범위 180도를 초과한 것입니다. 


180도를 초과한 90도만큼 동남쪽 후방이 무방비 지역인 것입니다. 방어도 문제이지만 후방으로부터 공격당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적대가 함락되면, 옹성과 문이 위험하고, 그다음은 성 전체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치성은 이웃하는 치성과 함께 성으로 접근하는 적의 측면을 양쪽에서 마주 보며 공격하는 것이 주기능입니다. 그런데 북동적대의 돌출 방향은 북쪽이고, 이웃한 북동포루의 돌출 방향은 동쪽입니다. 결과적으로 북동적대는 치성의 기능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검토 단계에서 찾은 문제점입니다.

다음 6단계는, 문제점에 대한 대책을 설계에 반영해야 합니다. 


대책에는 정조(正祖)가 나서야 합니다. 돈, 시간, 전략이 얽힌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전략가 정조는 돈과 시간의 추가를 감수하고, 방어 공백에 대한 대책으로 치(雉)를 추가하도록 결단합니다.

북동적대에 직각으로 붙여 북동치를 추가로 설치하였기 때문에 무방비였던 성의 동쪽과 적대의 남쪽에 대한 방어가 완성되었다. 사진은 북동치이다.

북쪽으로 돌출된 북동적대에 붙여 동쪽으로 돌출된 치(雉)를 설계하라고 결정합니다. 이제야 성에 접근하는 적의 옆구리를 북동포루와 함께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치 이름에 북동(北東)을 붙인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북동치(北東雉)의 탄생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문 "왜 북동치와 붙었을까?"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결론으로 정리하면, 첫째, 북동적대에서 90도 꺾이게 된 이유는 정조의 지시로 북문과 동북각루의 위치가 확정되면서 시작된 피치 못할 산물이고, 둘째, 북동치의 추가 설치 이유는 썽이 90도로 꺾여서 북동적대의 돌출 방향이 이웃하는 북동포루의 돌출 방향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필요가 없었던 북동치(北東雉)의 탄생 과정과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함께 원성(元城)과 곡성(曲城)의 배치에 대해 설계 과정을 되짚어 보며, 설계 순서(Design Process)를 바르게 지킨 정조(正祖)의 장인정신(匠人精神)도 엿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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