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강웅 Aug 26.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6

봉돈(烽墩)을 왜 광교산에 세우지 않았을까?

[화성의 봉돈은 행궁(行宮)과 마주한 안산(案山)인 동성(東城)에 설치했다. 더 높은 팔달산이나 광교산이 더 유리할 터인데 의아하다]


봉돈(烽墩)을 왜 광교산에 세우지 않았을까?


화성의 시설물에서 성(城)에 접한 모든 시설물 이름에는 방위명이 꼭 붙는다. 예를 들면 서북공심돈, 동북노대의 "서남(西南)"이나 "동북(東北)"처럼 방위명이 붙어있다. 이렇게 말하면 화성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은 "아니, 예외가 있다" 하실 것이다. 바로 "봉돈(烽墩)"이다. 유일하게 봉돈에만 방위명이 안 붙어있다.


봉돈의 주 기능은 궁(宮)과 먼 곳의 내륙이나 해안과 정보를 소통하는 것이다. 의궤에도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라고 그 목적을 말한다. 

성(城)에 설치된 화성의 시설물 중 이름에 방위명이 안 붙은 시설물은 봉돈(烽墩)이 유일하다.

화성 봉돈은 세계 모든 봉화 시설물 중에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위치가 특이하다. 봉돈의 목적이 연기와 횃불에 의한 정보 소통이라면 지금 위치보다 더 높은 팔달산이나 광교산이 더 유리하고, 땔감이 많이 소요되므로 산이 유리할 터인데 그 보다 아주 낮은 곳 마을 인근에 설치했다.


둘째, 형태가 특이하다. 봉화대나 봉수대처럼 대(臺)의 형태가 아니고, 봉돈이란 명칭에서 보듯 돈(墩)의 제도를 합친 형태이다. 외형만 보더라도 "성(城)의 몸체 위에다가 벽돌로 다시 높게 쌓았으며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나오게 하여 마치 치(雉)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외면의 돌로 쌓은 것이 5층, 벽돌로 쌓은 것이 62층으로 전체 높이 25척, 너비 54척이다"라고 도설(圖說)에 설명한다. 문(門)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화성의 봉돈은 봉수대처럼 대(臺)의 형태가 아니다. 돈(墩)의 제도를 융합한 특수한 형태로 문(門) 다음으로 크다.

셋째, 막강한 공격 시설도 갖췄다. 현안이 2개이고, 화두(火竇) 사이에 여장을 설치하고 포혈(砲穴)을 18개 설치하고, 화두 아래 2개 층 벽면에도 총안(銃眼) 18개를 내었다. 화두란 불이 나오는 길쭉한 굴뚝 형태로 5개가 있다.


왜 높은 곳에 설치하지 않았을까?

왜 봉화(烽火) 일뿐인데 막강한 공격력까지 갖추어 놓았을까?


먼저 봉돈의 임무를 보자. 저녁마다 남쪽의 첫 번째 화두에서 횃불을 들면 동쪽 석성산의 육봉(陸烽)과 서쪽 흥천대에 있는 해봉(海烽)에서 응한다. 석성산은 용인시 동백지구 뒷산이다. 그런데 흥천대 바다 봉화는 너무 멀어 중간쯤 화성부의 서쪽 30리 서봉산 위에 새로이 샛 봉화(間烽)를 두어 화성 봉돈에서 오는 신호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서봉산은 화성시 정남면 문학리 뒷산이다. 

왼쪽 끝이 광교산이고, 오른쪽 끝이 용인 석성산이고, 행궁 광장 불탑 직선 끝이 화성 봉돈이다.

이제 이유를 살펴보자. 현대 전쟁에서도 정보의 전달과 공유가 중요하지만, 기동력이 없던 당시에는 정보의 전달이 승패의 요체였다. 만일 필요한 시기에 정보가 전달되니 않으면 이는 곧 패배이다. 또한 오염된 정보나 거짓 정보가 전달된다면 이도 곧 패배이다. 미드웨이 해전은 역정보(逆情報)에 의한 정확한 정보 획득이 승리의 핵심이었다.


돈(墩)과 봉화대의 기능은 원래 척후(斥候)와 정보(情報)의 전달이다. 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위치로는 높은 곳을 최고의 입지로 삼았다. 하지만 높은 곳일 경우 외딴곳이 될 경우가 많고, 경계를 위한 충분한 병사와 병참을 장기간 배치하는데 불리했다.


많은 전쟁 역사에서 외딴곳의 돈이나 봉화대가 적에게 점령당하여, 필요한 시기에 정보가 전달되지 못하고, 때로는 조작된 정보를 보내는 경우를 당하였다. 이런 전쟁 역사의 교훈에서 정조는 화성에서 돈과 봉화대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꿨다.  

전쟁 승패의 역사 교훈에서 정조는 돈(墩)을 공심돈(空心墩)으로, 봉화대를 봉돈(烽墩)으로 시스템 전체를 혁신하였다.

첫째, 위치를 완전히 바꿨다. 높은 곳, 외딴곳에 있던 봉화대를 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화성에서 봉돈의 위치는 행궁의 안산(案山)이며 마주 보이는 동성(東城)에 자리 잡았다. 원성과 잇대어 성을 돌출시키고 돌출된 치(雉)에 공심돈과 봉돈을 배치했다. 의궤에도 "그래서 드디어 철성(凸城)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소 봉돈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철성(凸城)이란 성에서 돌출된 모습을 말한다.


둘째, 형태를 완전히 바꿨다. 형태는 기능을 지배한다. 돈(墩)은 공심돈(空心墩)으로, 봉화대는 봉돈(烽墩)으로 시스템 전체를 바꾼 것이다. 바꾸면서 막강한 화력을 배치하여, 방어를 위한 방어가 아니라, "공격에 의한 방어"라는 개념으로 방어의 기조를 바꾼 것이다.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높고 외딴곳에서 성(城)으로 봉돈을 끌어들였다. 이젠 화성 봉돈의 운명은 화성 행궁과 함께 할 것이다.

화성의 봉돈은 그 형태가 봉화 시설로는 세계 유일의 매스(Mass)다. 정조에게 역사(歷史)는 과거에 머무르는 역사가 아니라, 미래로 가는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대상(對象)이었을 뿐이다. 저 멀고 높은 곳에서 떼어와 화성에 붙여놓은 봉돈(烽墩)을 보며 정조(正祖)의 역사 인식과 혁신 마인드를 엿보았다.

작가의 이전글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