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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Sep 02.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7

남공심돈(南空心墩)은 왜 실패작일까?

중국의 돈(墩)을 도입하되 개선하여 공심돈(空心墩)으로 바꿨다. 화서문을 지키는 서북공심돈은 그 형태가 아름답다. 수원 화성 심벌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남공심돈(南空心墩)은 왜 실패작일까?


화성에는 독특한 외형을 갖고 있는 시설물이 여럿 있다. 이 중 공심돈이 으뜸이라 생각한다. 동북공심돈과 서북공심돈은 화성 상징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또한 수원시의 상징처럼 독창적 매스(Mass)를 갖고 있다.


공심돈(空心墩)이란 무엇일까?


구조와 기능에 대해 성서(城書)에 "벽돌로 3면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둔다. 그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 사닥다리를 이용하며, 위아래에 구멍을 많이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게 한다. 불랑기(佛狼機) 백자총(百子銃)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있다"라고 기록하였다.  

공심돈은 구멍을 많이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고 불랑기(佛狼機) 백자총(百子銃)등을 발사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사진은 서북공심돈 내부이다.

기록으로 분석해 보면 첫째, 화성의 시설물 중 가장 높기 때문에 문을 좌우에서 호위하는 적대(敵臺)와 같은 역할을 하고, 둘째, 벽에 구멍을 내고 마루를 깔아 대포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포루(砲樓)와 같은 역할을 하고, 셋째, 맨 위층에 집을 지어 병사를 보호하면서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포루(舖樓)의 역할도 한다. 한마디로 다목적 군사시설이다.


화성에는 남공심돈, 서북공심돈, 동북공심돈 3곳의 공심돈이 있다. 이 중 남공심돈에 대해 의궤(儀軌)는 "남암문 동치(東雉) 위에 있다. 제도는 모두 서북공심돈과 같으나 작다"라 하였다. "제도가 같다"란 의미는 시스템, 형상, 기능 등이 같다는 의미이지 규격까지 모두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

남공심돈(南空心墩)은 미복원 상태라 의궤(儀軌) 그림을 통해 모습을 본다. 치(雉)에서 사방 모두 3척의 공간을 두고 안으로 들여 공심돈을 올렸다

제도가 같다고 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차이점은 서북공심돈은 치(雉)와 같은 면으로 연속해서 공심돈을 올렸으나, 남공심돈은 치 위에서 4면을 모두 3척씩 안쪽으로 들여서 건립한 점이다. 즉 치 위에 3척의 공간을 두고 안쪽에 공심돈을 올린 것이다. 남공심돈의 이런 계획은 정조의 뼈아픈 실책이며 남공심돈은 화성에서 최대의 실패작이 되었다.


서북공심돈과 여러 수치로 비교해 보자. 서북공심돈이 너비 사방 23척, 건축면적 50제곱미터, 연면적 139제곱미터인데 반해, 남공심돈은 너비 사방 13척, 건축면적 16제곱미터, 연면적 38제곱미터로 남공심돈의 사용면적은 서북공심돈의 27%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포혈의 규모도 서북공심돈이 43개인데 비해 남공심돈은 13개로, 서북공심돈의 28%이고 수량은 무려 30개가 적다.  

남공심돈은 서북공심돈과 비교하면 규모, 사용면적,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작다. 작다 보다는 초라하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두 공심돈이 앉혀진 바탕이 되는 치(雉)의 면적은 남공심돈이 서북공심돈보다 6%가 넓은데, 남공심돈의 바닥면적, 연면적, 집을 지을 최상층 바닥면적은 서북공심돈의 32%, 27%, 23%가 되어 매우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 비율도 문제지만 벽두께와 사다리 면적을 빼면 대포 1대 운용하기에도 빠듯한 쓸모가 없는 공간이다. 규모, 면적, 화력은 결국 방어력의 차이가 된다.


왜 남공심돈은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


원래 화성의 공심돈은 중국의 병서에서 돈(墩)을 참고하였는데, "무비지(武備誌)"의 돈후도(墩侯圖)를 자세히 살펴보면 주변 관측이 용이하도록 평지보다 높은 땅에 세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남공심돈은 이런 중국의 돈(墩) 제도를 가장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조건은 같은데 사용면적은 남공심돈이 서북공심돈의 3분의 1 정도다. 이유는 공심돈 중 가장 먼저 착수하여 중국의 돈(墩) 제도를 가장 잘 따랐기 때문이다.

공심돈의 완성 순서는 남공심돈, 서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이다. 가장 먼저 착수하고 가장 먼저 완성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중국 제도를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의궤 도설(圖說)에는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동북공심돈 순(順)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서북공심돈이 가장 먼저 만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공심돈은 설계를 잘못한 것이라기보다 중국의 제도를 충실히 따른 것뿐이다. 서북공심돈은 설계를 잘한 것이 아니라 개선(改善)을 충실히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남공심돈을 건설하며 파악한 문제점을 서북공심돈에 반영한 것이다. 어찌 보면 남공심돈은 화성에서 공심돈의 파일럿 프로젝트(Pilot Project)였다.  

남공심돈은 화성에서 공심돈의 사실상 파일럿 프로젝트(Pilot Project)였다. 사진은 서북공심돈의 모습이다.

그러면 남공심돈의 어떤 문제점을 개선하였을까?


첫째는 공심돈이 세워질 치(雉)에서 3척씩 안으로 들어가 세운 치명적 잘못을 개선하였다. 물린 사방 3척을 공심돈으로 포함시켜 사용면적을 3.5배 이상으로 대폭 늘려 쓸모 있는 공간으로 바꿨다.


둘째, 치의 여장에 가리기 때문에 설치하지 못한 1층에도 많은 포혈(砲穴)을 설치하여 공격력을 3.3배로 대폭 강화하였다.


셋째, 최상층 집의 바닥면적을 9.6제곱미터에서 42.9제곱미터로 4.5배나 늘려 적의 동태를 살필 뿐만 아니라 공격할 수 있는 전안과 총안(銃眼)을 대폭 늘렸다.


끝으로 개선은 아니지만 내부 공간이 넓어짐으로 층 사이를 오르내리는 나무 사닥다리의 경사도가 완만해져 병사는 물론 무기나 대포알 등의 이동이 신속해졌다.

서북공심돈은 후에 지어지는 동북공심돈에 문제점을 알려준다. 남공심돈에서 서북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에서 동북공심돈으로, 공심돈은 계속 진화한다

원래 중국의 돈(墩)은 성(城)과 떨어져 세웠다. 돈(墩)은 대포 등 무기의 발달로 적에게 함락당하기 쉬워졌다. 이에 정조는 돈을 성으로 끌고 들어와 돌출된 치(雉) 위에 세웠다. 또한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 공격에 의한 수성(守城)"으로 방어전략을 바꿨다. 그 산물이 바로 공심돈(空心墩)으로  속을 비우고(空心), 대포 등 막강한 화력을 배치한 것이다.

적에게 공심돈은 보기만 해도 공포의 대상이다. 적대(敵臺), 포루(砲樓), 포루(舖樓)의 3가지 역할을 모두 갖춘 더목적 전투 시설이다. 사진은 성 밖에서 본 서북공심돈이다.

남공심돈에서 3척을 안으로 물린 것은 정조의 치명적 실수였다. 하지만 무기의 발달로 변화된 환경에 맞게 성 안에 건립하였고, 앞서 건설한 남공심돈의 실패를 확실히 개선한 서북공심돈에서 정조(正祖)의 이노베이션(Innovation) 마인드를 엿보았다. 진정한 혁신경영의 한 단면이다.


필자는 실패를 떠나 남공심돈 자체의 모습은 서북공심돈보다 더 아름답다고 본다. 팔달산을 배경으로 이웃한 팔달문, 남동적대, 남암문, 남수문과의 조화는 용연, 각건대, 방화수류정 조합만큼이나 아름다운 화성의 시설물이다. 언제나 복원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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