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개비농사꾼 Oct 27. 2024

[자작소설] 휴일

열심히 썼지만.. 부끄럽다..


아침햇살이 포근하게 눈을 두드렸다.


"우웅……."


 조건반사적으로 기지개를 켰다. 어디갔더라, 분명히 침대 왼쪽에다 시계를 뒀는데. 더듬거리는 왼손에 직육면체 하나가 잡혔다. 아무렇게나 잡고 희미하게 뜬 눈에 비췄다.


'AM 9:02'


"아, 아홉시……으잉?"


찬물로 세수를 한 듯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할 때가 아닌데? 얼른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신랑을 찾았다.


"자기야?"


옆자리에 없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실을 나와 거실, 부엌을 두리번거렸다.


"자기야아?"


……없구나. 하기야 지금쯤 회사에 출근도장 찍고 있을 시간이다. 싱크대에는 설거지도 못하고 급하게 물만 부어놓은 밥그릇이 있었다. 어휴, 좀 깨워주지. 이 양반은 왜 혼자서 차려먹고 낼름 나가버리냐고 불평하면서 나른하게 내 아침밥을 차렸다. 마침 밥이 한 그릇 정도 남아있었다. 대강 김치와 된장국을 벌려놓고 숟가락을 들었다.


혼자 먹는 밥은 무채색처럼 밍밍했다.


다 먹고 치우는 도중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하늘 위도, 땅 속도 아니고 그냥 먼 곳에서 절규하는 듯한 괴성……아니, 괴성들. 갑자기 어렴풋이 들려서 몇 명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냥 셀 수 없을 정도일까.


"어라?"


주위를 둘러보다가 베란다에 가서 창 밖을 봤다. 아무 일 없는 일상의 풍경이다.


"잘못 들었나……."


대강 설거지를 하고 나니 열 시쯤 되었다. 생각해보면 점심을 한 시쯤 먹어야 하니 점심 메뉴를 생각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혼자 먹었을 때 맛있는게 뭐더라.


쌀을 씻어 불려놓고 냉장고를 열어 익은김치를 확인한 후, 간단한 청소에 들어갔다. 젖은 걸레로 냉장고 위, 서랍장 사이, 책장, 장식장 등을 문지른다. 30분이 채 안 지나 걸레가 거의 검어졌다. 매일 닦아도 먼지는 끝없이 나온다.


혼자 청소하는 집은 부담스럽게 넓었다.


걸레를 빨아서 쭉 짜놓고, 본격적인 요리 작업에 들어갔다. 불려놓은 쌀을 전기밥솥에 잘 앉혀놓고 취사를 눌렀다. 냄비에 식용유를 두르고 냉장고를 뒤져 남겨놓은 두부 반 모를 찾아냈다. 먹다 남은 김치를 찾아 두부와 함께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요리는 심심하다. 양파를 꺼내 대강 썰면서 김치를 볶았다. 물을 부으면서 다시다와 함께 양파를 넣자 서서히 찌개의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은 김치양념은 어차피 버려야 하기 때문에 두부와 함께 냄비에 부었다. 두부가 김치양념에 잘 덮여서 보기 좋았다.


충분히 국물이 우러날 때까지 간간히 물을 부어주면서 청소기를 돌렸다. 1시간여쯤 끓였을까,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까지 끝나자 대강 찌개처럼 보이는 게 냄비에서 끓고 있었다. 찬장에서 햄 통조림을 꺼내 다진 마늘, 대파와 함께 넣고 한번 더 끓여내자 훌륭한 김치찌개가 탄생했다. 고기 사오기가 귀찮아서 대신 넣은 햄 때문에 조금 부대찌개로 보이는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급조한 김치찌개인지 부대찌개인지로 점심을 때우고 나자 빨래의 시간이 왔다. 축복받은 시대에 사는 것을 감사히 여기며 세탁기를 돌렸다. 빨래가 되는 동안 구운 김 한통을 까먹으면서 TV를 틀었다.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웅얼거리는 소리가 찾아왔다. 나는 TV를 껐다. 아까의 소음이었다. 이번엔 좀더 작게. 그러나 길고 확실하게 들린다. 흐릿하지만, 비통에 찬 졀규는 아니다. 아마도 환희에 겨워 내지르는 탄성일까. 몇 초만에 소음은 사라졌다.


껄쩍지근한 기분에 입맛을 쩍쩍 다시며 다 된 빨래를 널고 마른 빨래를 걷었다. 마룻바닥에 펼쳐놓고 개다가 갑자기 그의 와이셔츠가 눈에 밟혔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리미를 꺼냈다.


그의 와이셔츠는 덜 갠 이불처럼 꾸깃거렸다. 


소매부터 차분히 다리기 시작했다. 정장은 아무래도 날이 생명이니까 평소에 잘 다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소매를 끝내고 나면 어깨까지 올라가서 어루만지듯 소매로 내려온다. 와이셔츠를 뒤집어 펼친 채로 뭉친 어깨를 안마하듯 어깨 뒤쪽을 다렸다. 앞판과 뒷판을 거쳐 칼라까지 다리고 나자 와이셔츠가 제법 번듯해 보였다. 탁탁 털어서 옷걸이 가장 앞부분에 멋지게 걸어보았다.


어느새 4시였다. 저녁준비를 할까 하다가 신랑에게도 낮에 만든 정체모를 찌개를 먹이기로 했다. 저녁준비가 간단해졌으므로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하고, 잠깐 쉬어두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주위는 정적. 아니, 예의 소리가 들린다. 아주 약하다. 약간의 생활 소음이라도 있으면 안 들릴 것 같다. 무슨 소린지 궁금해진 나는 가만히 소리에 집중해 봤다.


일종의 라디오파를 듣고 있는 듯한, 신기한 소리였다. 그것은 괴성이라거나 절규라거나 탄성이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여러 사람이 강당 같은 곳에 모여 각자 얘기할 때 웅성대는 듯한 소리에 가까웠다. 벽을 뚫고 전달되는 것인지, 아련하고 멀지만 사방에서 들려온다. 말소리를 들어보려고 했으나 너무 작고 여러 소리가 겹친 탓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외국어도 몇 종류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소리길래 자꾸 들리는걸까, 정신검진이라도 받아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였다.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곧 거대한 아우성에 파묻혀 없어졌다. 그 아우성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나를 감싸안았다. 그것은 거대한 목소리의 바다였다. 모든 주파수대에서 나오는 웅성임이 나를 난타했다. 나는 두 귀를 막고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허우적댔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내 두 손을 뚫고 들어와 점점 더 커져 종래는…….


"!!"


깨어났을 때, 사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거칠게 깜빡이는 내 눈 옆으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오른팔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고, 부엌으로 향했다. 소음은 자기 전보다 조금 심해져 있었다.


부엌엔 불이 켜져 있었다. 신랑은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수척한 얼굴은 무표정했다. 조금 자라오른 수염이 까칠하게 턱을 덮고 있었다.


"자기야, 들어왔어?"


대답이 없다. 그보다,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기야?"


한 번 더 불러보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없는 사람인양 행동하고 있다. 왜 이러지?


"자기? 무슨일 있어?"


고백하자면, 더럭 겁이 났다. 오늘은 아침부터 자꾸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나, 내가 알지도 못하는 동안 이상한 세계에 들어와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다가가 살며시 어깨를 잡았다.


잡으려고 했다.


"이, 이건……."


내 손은 그의 등을 완전히 통과해 들어갔다. 나는 마치 홀로그램처럼 그의 등을 뚫고 들어간 내 손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귀에 약하게 들리던 소음의 크기가 최대치로 올라갔다.


"---------------정신 차려!!"


누군가가 나를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네가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아?"


다른 곳에서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아……."


그제서야 깨달았다. 김치찌개가 없었다. 아침에 했던 걸레질도, 오후에 했던 빨래도 모두 없던 일이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문득 처다본 형광등이 빙글빙글 돌았다. 현기증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오늘은 할로윈. 전 세계의 귀신들이, 일년에 단 한 번 갖는 휴일.


생각해보면, 그리 불행한 죽음은 아니었다. 오랜만의 나들이를 마치고 그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행복하게 조수석에 몸을 묻고, 그대로 끝. 아직도 휴식을 택하지 않은 수많은 혼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비하면 이런 죽음, 질투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다. 하지만 나 또한 도저히 명계로 돌아가 휴식할 수가 없었다.


그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돌린 자신을 저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기의 관리를 인수인계받아 한동안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거식증에 걸려 완전히 깡말라버린 그를 계속 지켜보았다. 그는 술을 마시지도, 교통법규를 위반하지도 않았다. 단지 운전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천재지변처럼 돌진해왔을 때, 그는 무의식이 시키는대로 자연스럽게 운전석을 보호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전혀 잘못한 일이 없었다. 그 말이 전해지기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듬직한 왕자님이었지만, 스스로 밥도 못 차려먹는 바보었다. 처음에는 곧 날 따라 죽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태위태했지만, 차츰 무채색처럼 밍밍한 밥과 부자연스럽게 넓은 집, 꼬깃꼬깃한 와이셔츠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가 다시 일어서는 걸 지켜보며 행복해하기까지는 지내온 결혼생활보다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음, 글쎄요? 이번 휴일에는, 모든 걸 잊고 그를 위해 하루정도 집안일을 해주고 싶어요.'


깨어나자, 완전히 한밤중이었다. 주섬주섬 일어나보니 아직 부엌이었다. 바깥에서는 휴일을 맞은 귀신들이 축제에 한창이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행진소리가 잡담에 섞여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다행히 휴일이 끝나진 않은 모양이다. 그는 일이 힘들었는지 이미 침실에서 곯아 떨어져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닿지 않는 손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배시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힘들지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 계속, 계속 당신을 지켜보며 하고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제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네요."


바깥에서는 행진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곧 휴일은 끝난다.


"요새 많이 수척해졌어요. 무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집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재혼을 하는건 어떨까……. 헤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미안해요."


그는 알까? 내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언제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건, 단지 그의 행복뿐이라는 것을.


"욕심인 건 알지만, 나는 당신이 많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당신도 알고 있죠?"


세월에 비해 더 깊게 패여버린 그의 주름살이 너무 아파서, 가만히 어루만졌다. 만질 수 없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건 상관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좀 더 많이 행복해지세요. 지금 힘드니까, 분명 당신의 앞길은 행복으로 충만할 거예요. 난 믿어요."


만져지지 않는 그의 머릿결을, 혹시 깰까 조심히 쓸었다. 귀신들은 이제 행진을 끝내고, 자신들의 파동을 공간에 공명시켜 색색의 불꽃놀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인간들하고 별 다를바 없지만, 먼 옛날부터 축제의 마지막은 이렇게 맺어왔다고 한다. 각양각색으로 펼쳐지는 빛은 인간에게나 귀신에게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던 것 같다.


"사람은 간절히 원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대요. 봐요, 저도 이렇게 당신의 앞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믿어 주세요. 같이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분명 믿는 대로 이루어질 거예요. 전지전능한 대자연께, 당신의 앞길에 언제나 행복이 가득하길."


어쩐지 뿌연 시야에 그의 얼굴을 가까이 담았다. 자는 얼굴에 닿지 않는 입술을 맞췄을 때, 정확히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불꽃놀이가 우리 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게임학 노트] 규칙에 대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