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물던 자리

by 나무를심는사람

“기억은 흐려지지만, 마음은 언제나 먼저 그곳으로 돌아간다.”


가끔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기억이 아닌 마음이 먼저 어떤 장소로 달려가곤 한다.
그날이 그랬다.
늘 다니던 길인데,
발끝이 멈춘 건 아주 오래 전
아빠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골목 어귀였다.

낮은 돌담과 철제 대문,
그리고 벽에 작게 쓰여 있던
‘주의: 고양이 출몰’이라는 낡은 경고판.
모두 그대로였다.
그때와 달라진 건 내 키와 마음뿐이었다.


“여기, 기억나?”
아빠가 그 골목을 지날 때면 꼭 멈춰 서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곤 했다.

내가 세 살 무렵,
이 집 담벼락 앞에서 넘어져 무릎을 까맣게 까졌는데
그날 이후로도 같은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나는 꼭 걸음을 늦췄다고.

“하윤이는 무섭거나 아팠던 자리를
다시는 지나치지 않으려는 아이였어.
그런데도 꼭 아빠 손을 꼭 쥐고 다시 걸었지.”
아빠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아빠가 내 기억보다
나를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왜 이 골목 앞에서 멈춰 섰을까.
이미 아프지도 않은 그 기억을
굳이 다시 떠올리며,
그날의 무릎보다 더 아픈 마음으로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음이 먼저 돌아온 거라고.
지금 내가 가장 그리워하고,
가장 기대고 싶은 사람은
그 시절의 아빠였다는 걸.


그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사람.
기억 속에서 점점 흐릿해지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여전히 그 손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그 시절보다 훨씬 커진 발걸음이
마치 그때의 나를 따라 걷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담벼락 아래
아주 작게 피어 있는 민들레 하나를 보았다.
봄마다 아빠가 말없이 꺾어
내 손에 쥐여주던 바로 그 꽃.
숨기듯, 소리 없이
언제나 내 손 안에 남겨지던 그 다정함.

나는 주저앉아
그 민들레를 한참 바라보다
이름도 없이 피어 있는 그 자리에
속으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여기 있었구나. 아직도.”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흐릿해진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어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마음이 잊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다 어느 날,

이렇게 바람이 불고,
햇살이 들고,
길모퉁이의 공기가 그때와 닮은 순간
마음이 먼저 그 자리를 기억해낸다고.


나는 그날 하루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고,
괜히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골목을 다시 천천히 그려보며
그때의 나와 아빠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빠,

나는 아직도 그 자리로 돌아가요.
당신이 있던 마음의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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