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같은 자리에 있어주던 사람

by 나무를심는사람

“당신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나는 그걸 너무 늦게야 알아차렸다.”


살면서 가장 불안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아빠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다.

그건 단 한 번도
크게 드러난 적 없는 존재감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가장 많이 기대고 있었던 자리가
바로 거기였다.


중학교 입학식 날.
내 이름표가 너무 커서 옷깃에 자꾸 쓸려
괜히 기분이 나쁘고
긴장도 되고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지던 그 아침.


교문 앞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엄마의 목소리와 달리
아빠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운동장을 향해 걸어갔지만
그 순간에도 아빠가
거기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아빠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교실 앞에 서는 것조차
더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내 인생의 많은 장면에서
‘조용히 거기’ 있었다.


발표회가 끝난 뒤

꽃다발 대신 땀에 젖은 손으로 등을 두드리던 순간,
독서실 앞 벤치에서
밤늦도록 모포를 덮고 졸고 있던 그림자,
심지어는
“이제 나 혼자 다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던 내 뒤에서조차
당신은 한 걸음 물러서 있을 뿐
절대 떠난 적은 없었다.


그 시절 나는

변화를 꿈꾸던 아이였다.
늘 새로운 걸 원했고,
어제와 다른 내가 되고 싶어 했고,
반복되는 것은 지루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단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제야 안다.


그건 바로
늘 같은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리를 바꾸고
관계는 너무 쉽게 멀어진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지날 뿐이라는 말이
가끔은 섬뜩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문득 문득,
나는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게 된다.

아무 일 없어도

그저 ‘거기’ 있어주는 사람.
내가 돌아보고 싶은 순간마다
늘 똑같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아빠였다.

아빠는 떠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느라
그 자리를 잊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돌아와 그 자리를 바라본다.

비어 있는 줄 알았던 그 자리엔
아직도 아빠의 따뜻한 숨결이 남아 있다.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다는 듯
그대로 남아 있는 흔적처럼.


아빠,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군요.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얼마나 큰 다정함인지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있어주던 그 자리가
제 마음의 고향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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