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들어주는 사람

by 나무를심는사람

“말을 잘 들어준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들어준 사람. 그게 아빠였다.”


세상엔
‘잘 듣는 사람’보다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이 더 드물다.


잘 듣는 사람은 타이밍이 빠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하고,
적절한 질문으로 대화를 이끌 줄 안다.

하지만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은
반응보다 ‘머무름’이 먼저다.
대답하려 하지 않고,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저 그 마음 옆에 가만히 앉아주는 사람.

그리고 아빠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친구들과 심하게 다투고 돌아온 적이 있다.
나는 도무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던지고
“진짜 다 싫어!”
라고 외쳤다.

엄마는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때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식탁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아빠가 있는 줄도 몰랐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밥도 먹지 않고
거실 소파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아빠는 내 옆에
말없이 앉아
귤 한 알을 조용히 까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용히,
귤 껍질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방 안에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아빠는 반으로 나눈 귤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싫을 땐 그냥 싫다고 해도 돼.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게.”
그게 전부였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고,
조언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그날 나는
혼자 울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모두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아빠는 늘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학교 이야기를 한참 떠들어도
“그래서 어떻게 됐어?”
라는 말 대신
그냥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땐

괜한 농담이나 충고보다
내가 좋아하던 라디오 주파수를
작게 맞춰 틀어놓는 쪽을 택했다.

그건 말보다 더 깊은 경청이었다.
아빠는 말의 내용보다
내 마음의 결을 들으려 했던 사람이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말을 들어줄 때
자꾸만 조언하고 싶어진다.
무언가 말해줘야 할 것 같고,
도움을 줘야 할 것 같고.

하지만 그런 마음이
오히려 상대의 여지를 더 좁혀버릴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날 거실에 앉아
귤을 까던 아빠를 떠올린다.

그건 어떤 말보다
깊은 위로였다.


아빠,
당신은 늘 제 얘기를 잘 들어주셨죠.

말하지 않아도,
엉뚱하게 흘러가는 말에도
절대 끊지 않고 끝까지 들으셨던 모습.

그 조용한 귀가
저에게 얼마나 큰 안식처였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이제 저도
누군가의 말을
조용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말로 위로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귀 기울이는 사람.

당신처럼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에도 작은 창문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