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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Nov 02. 2020

부수적 피해라는 말의 힘

비겁한 자기합리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베트남전에서 일어난 '민간인 살상'을 두고 미군이 쓰는 완곡한 표현이다.

전쟁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전쟁으로 사망한 3백만 명 가운데 약 60%가 민간인이라고 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1,300만(군인 전사자는 830만). 심지어 2차 세계대전에서 전체 사망자 5,500만 중 군인은 더 적은 비율이다. 2차대전 말 독일 드레스덴 공습으로 사망한 민간인만 13만 5천에 달한다.

그뿐인가. 히로시마 원폭으로 20만, 나가사키 원폭으로 3만 9천, 걸프전에서 2만 2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3만 1천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한국 전쟁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좁은 땅에서도 무려 2백만의 무고한 시민이 뼈아픈 역사의 '부수적 피해자'가 되었다.



성장과 발전,  개선을 막는 교묘하고 비겁한 자기 합리화와 변명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부수적'이라는 말은 어떤 '주된 것에 붙어 (당연히, 혹은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부수적 피해'라는 말에는 '어쩔 수 없었다', '의도치 않았다'라는 핑계가 깔려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고,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의도적이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참전 군인이나 지휘관들의 죄책감도 덜 수 있다. '어쩔 수 없었'으니까.


말 한마디는 덩치도 크고 힘도 대단히 세다.

지금은 고인이 된 前 서울 시장은 실종 하루 전날 비서로부터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바 있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를 두고 '피해 호소인', '피해 고소인'이라는 표현을 써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피해자'의 맞은편에는 '가해자'가 있다. 하지만 피해자를 피해자라 부르지 않고 뒤에 '호소인', '고소인' 등의 단어를 덧붙이면 피해를 입었다는 본질이 흐려진다. 그 많은 전쟁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도 고작 두 단어로 감춰지는데, 하물며 한 사람의 억울함 정도야…


2008년이었나.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인 S사 회장이 특검에 소환되던 날. 비자금 운용, 재산 은닉, 전환사채 헐값 발행, 경영권 세습 의혹 등에 대한 내용으로 조사를 받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각 신문사 1면 중에도 유독 ㅈ일보 헤드라인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것이 내 책임!


실제 이 회장은 인터뷰에서 '모든 것이 내 불찰이다. 도의적이든 법적이든 제가 모두 책임지겠다'라는 말을 했다. 마치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기업의 회장, 즉 대표라서 (어쩔 수 없이) 책임을 지겠다는 늬앙스도 있다. 혐의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중의적인 의미를 잘 담은 말이다.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숨지도 않았다. 역시 배운 사람의 멘트는 다르다.

S그룹 측에서도 회장의 이 발언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쇄신을 검토하겠다는 의미로 생각된다'라며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이 부분이 중요하다. '없을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뜻이다.

이날 ㅈ일보는 두 번 발행되었다. 새벽에 배달된 첫 발행본엔 뭐라고 쓰여있었는지, 또 어떻게 다 치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카피를 내세운 재발행본이 구독자들에게 다시 배달되었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


현재 부동산 정책에 대한 모든 논란도 이 감성적인 글귀 뒤로 쉽게 감춰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문구가 정책의 문제점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는 곳'을 왜 그렇게 '사려고' 드는지,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겠나.(민감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인간의 의식은 교묘해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매우 기민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알아차리기도 어렵다. 어디 먼지만한 핑곗거리라도 하나 생기면 모든 잘못과 책임감, 죄책감, 양심은 모조리 그 뒤로 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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