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써봐야 하는 이유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어느 병원 홍보팀에 입사할 당시 1, 2차 면접을 모두 통과하고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고 있었다. 신문사에 보낼 의료 칼럼을 몇 편 써오라는 테스트였는데, 기자 출신도 아닌 데다가 칼럼? 그것도 의료 분야? 당연히 한 줄도 써본 경험이 없었다.
글밥 먹고살다 보면 이따금 익숙하지 않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글을 써야 할 때가 있다. 최근에는 HP에서 출시된 워크스테이션 모델에 대한 홍보 글을 의뢰받았다. 컴퓨터에 대한 글이라고는 블로그에 '노트북 새로 샀어요'라는 자랑질 외에는 써본 적 없고, 전문 지식은커녕 윈도우 혼자 설치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너무 대견한 수준인데. 그런 내가 최신 컴퓨터 모델에 대해, 그것도 일반 리뷰도 아닌 전문 바이어들을 설득하기 위한 글을?
사실 처음엔 글의 목적과 대상을 듣고 고사(苦辭) 했었다. 그런데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길래… 하! 그까이꺼 뭐. 써!보즈아~!
[자.낳.고] 자본주의가 낳은 원고
글자 크기 10포인트로 5페이지에 달하는 이 원고는 단 이틀 만에 쓰였다.(여러분 자본주의의 힘은 이런 겁니다.) 하지만 이 5페이지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와 구상에만 무려 일주일을 썼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대한 글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누구나 과정과 방법만 알면 가능하다. 그리고 글쓰기 실력을 제대로 키우고자 한다면 모르는 분야에 대해 글을 써보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글쓰기를 배우는 당신이
낯선 분야에 대해 글을 써봐야 하는 이유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대한 글쓰기는 어렵지만 도전 자체로 의미가 있다.
첫째, 그 '어려움'이 '무게'가 되어 근력을 키워준다. 매일 1kg도 안 되는 아령 백 번 드는 것보다 열 번쯤 겨우 들 수 있을 무게를 자꾸 들어야 근력이 빨리 는다.
둘째,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선 분야로의 탐험은 그 자체로 굉장한 경험이 된다. 그 경험이 문장력을 키워준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단어와 표현법을 익혀가다 보면 지식의 폭이 넓어지고 또 깊어진다. 폭넓은 경험과 지식은 다채로운 문장으로 구현된다. 멸치 한 가지만 넣고 끓인 육수도 나름 맛이 괜찮지만 황태, 파, 양파, 무, 다시마… 온갖 재료가 들어간 육수는 맛의 깊이가 다르다.
다시 말하지만 새롭고 낯선 분야에 대한 글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언제가 되었든 시작이 있어야 과정과 성취도 따르는 법.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오늘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기왕 걸을 때 익숙하고 편한 길을 벗어나 가끔은 험한 산길도 걸으면서 근육에 저항을 느껴야 체력과 실력이 붙는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누구나 시작은 서툴다.
누구에게나 시작은 있는 법. 날 때부터 글 잘 쓰는 사람은 없지 않나. 대학생들이 매주 쓰는 리포트는 어디 교수만큼 지식이 풍부해서 쓰겠나? 학창 시절 수많은 리포트 경험이 쌓여 졸업 논문이 된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 당신도! 얼마든지.
사실은 낯설고 잘 모르지만
아는 척 오달지게 쓰는 기술
1. 키워드 추출
새로운 분야에 대해 글을 쓰려면 거기서 어떤 용어들이 쓰이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즉,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단어 수집이다. 예를 들어 영화 평론이나 리뷰를 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시놉시스가 뭔지, 미장센, 모티프, 오마주, 클리셰는 뭔지, 숏(shot)과 씬(scene), 그리고 시퀀스(scquence)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도는 찾아봐야 한다. 소위 '영화 판'에서 쓰이는 어휘들을 수집해 그 의미부터 배워야 글을 쓸 수 있다.
수집하는 방법은 '영화 용어', '경제 용어', '주식 용어' 등 'OO 용어'로 검색하면 된다. 혹은 해당 분야의 글을 읽으면서 처음 접하는 단어를 뽑아 검색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키워드를 먼저 수집하는 방식은 새로운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할 때도 상당히 유용한 접근법이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들이 쓰는 용어에 익숙해지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일단 용어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 분야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지고 사고의 틀도 확장되기 때문이다.
HP 원고를 쓰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도 컴퓨터 분야에서 주로 쓰이는 키워드 추출이었다.
그다음에는 각각의 기본 개념을 찾아서 공부했다. CPU가 뭐 하는 장치인지부터, 각각의 프로세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 옵테인 메모리는 기존 메모리와 무엇이 다른지, 기존 상식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하나 다시 찾아봤다.
그리고 딥러닝 부스트와 오픈비노(Open VINO 등 의뢰받은 PC에 사용된 인텔의 기술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경쟁사인 AMD의 기술도 같이 찾아봤다.
정작 원고에 경쟁사 제품은 다루지 않았지만 '이쪽' 분야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쪽' 분야도 함께 봐야 한다.
2. 전문가의 글 답습하기
기초 개념이 잡히고 난 다음 할 일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글을 찾아 읽는 것이다.
병원 홍보팀 입사 시험(?)을 치를 때도 마찬가지로 의료 관련 기사들을 먼저 찾아 읽었다. 이때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성과가 없고 글에서 패턴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패턴이라 함은 글의 구조와 표현 방식을 의미하는데, '모르는 분야에 대해 글쓰기'가 어렵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 분야의 글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상당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독서와 훈련 중 더 도움이 되는 쪽을 굳이 꼽으라면 '훈련'. 그렇다고 독서가 무용(無用) 하다는 뜻은 아니고.
우선은 글의 전체 구조를 파악해야 된다. 예를 들면, 초등학생들이 쓴 독후감을 보면 대부분 [줄거리 - 감상]이라는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 리뷰의 경우 일반적인 구성은 [영화 줄거리 요약 - 감독 및 출연 배우 소개 - 제작 관련 에피소드 - 영화에 대한 감상평] 정도다. 이 구성을 기본으로 순서에 변화를 주면서 각각의 분량을 전체를 기준으로 적절히 배분하면 된다. 책(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대사)를 오프닝으로 쓴다든지, 구성 요소 중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등의 응용을 하면서 차츰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나가면 된다.
3. 패턴을 몸으로 익히게 도와주는 필사(筆寫)
잘 쓰여진 전문가의 글을 필사(筆寫)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글의 흐름, 표현 방식, 문단을 나누기부터 맞춤법까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여러 기술들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는 훈련법이다. 다만 필사는 '도움이 된다 / 되지 않는다'로 의견이 갈리는 훈련인데 이는 필사한 글과 내 화법이 맞지 않아 그런 것이지 필사 자체는 잘못이 없다. 좋은 글, 나와 잘 맞는 글을 차근차근 잘 베껴서 써야 도움이 된다.
13년 전 그 날ㅡ
두 번의 면접, 그리고 의료 칼럼 쓰기라는 마지막 테스트 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 병원에 입사할 수 있었던 나는
그렇게 의료 전문 마케터 경력을 쌓게 되었다. 이후 2년 동안 칼럼만 2,200여편을 쓰면서 전문적이고 어려운 의학 지식을 글로 쉽게 풀어내는 방법을 익혔고 지금은 그 경험 덕분에 어지간히 글 좀 쓴다는 작가들도 엄두를 못 내는 의료 전문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었다. 남들과 다른 글을 쓸 수 있게 된 시작은 반대로 남들이 썼던 글을 그대로 답습해보는 훈련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아마 막막하고, 어렵게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 한마디만 믿고 시작하면 좋겠다.
"할 수 있다!" 한글만 알면, 누구나.
글쓰기의 9할은 자신감이다. 내가 처음 접하는 컴퓨터 분야(HP원고)에 달려들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