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가장 따뜻했던 겨울
그날, 그녀는 말했다.
우리의 흐르는 시간은 다르다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뻐근했다.
마치 내 마음만 너무 앞서 있었던 것처럼.
아무리 달려도 함께 도착할 수 없는 거리라는 걸
갑자기 알아버린 사람처럼.
그 말은 조용했지만, 총성과 같았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채 정확히 심장을 관통당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말을 했고,
나는 가만히 무너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는 늘 한 걸음쯤 멀리 서 있었던 것 같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는 태도로.
함께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이 관계의 끝을
이미 어딘가에 접어두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게 어른스러운 사랑의 방식이라 믿었다.
마음을 얽매이지 않고,
상대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더 깊은 감정이라고.
그녀의 차가움은
따뜻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시작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제야 알게 됐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사랑의 방식은 너무도 달랐다는 걸.
나는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는 쪽이었고,
그녀는 사랑하기에 보내주는 쪽이었다.
그 차이는 결국
우리가 다른 곳을 향해 걷고 있다는 증거였고,
나는 그 증거를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은 정직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나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랑의 끝은
말로 오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먼저 스며든다.
사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떠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사랑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단번에 등을 돌릴 수 있었을까.
내가 쌓아온 시간과 마음들이
그녀에겐 그렇게 가벼웠던 걸까.
나는 그녀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보다,
그 마음은 끝까지
내 손을 붙잡아줄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사실이
더 오래 아프게 남았다.
그녀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랑이 끝까지
내 손을 놓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결국 내가 무너진 건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다.
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한 이별이라면,
그것마저도 이루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라 믿었다.
억지로 붙든다고 해서
그녀의 마음이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끝내, 나 없는 행복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했기에 그녀를 보내줬고,
보내줬기에
더 이상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우리’라는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안에 우리가 함께일 거라는 말은 없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와 같은 그림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지운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을 안고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나 없이도
앞으로의 날들을 그려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어쩌면
가장 조용하고,
가장 선명한 이별의 시작이었다.
나는 노력했다.
그 관계 안에서만큼은
어떤 꾸밈도 없이 서 있으려고 애썼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나를 포장하지 않았고,
모든 말과 감정을
가능한 한 투명하게 꺼내 놓았다.
그건 사랑을 얻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진짜 나로 사랑받고 싶다는
아주 단순하고 조용한 바람이었다.
어쩌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진심은 함께가 아니라
나 혼자서만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열어둔 마음의 창 너머에서
그녀는 이미,
서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랑은 어느새
함께 나누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상대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감정은 점점 자연스러움을 잃고,
설득이 되었고,
변명이 되었고,
애원이 되었다.
나는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사랑을 주고받고 있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떠난 뒤,
나는 어떤 말도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다.
좋아한다는 말,
곁에 있을 거라는 다짐,
영원하다는 약속조차
어느 순간,
다 허공으로 흩어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으니까.
사람의 말은
진심일수록 쉽게 남고,
쉽게 부서진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말보다 믿음이 먼저 깨질 수 있다는 걸.
그 믿음이 깨어진 순간,
말은 그냥 공기 중에 흘러가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조용히 마음을 닫는 법을 배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날을 자꾸 떠올린다.
그녀의 목소리,
그 말의 온도,
그 침묵의 결까지도.
이젠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아는데도,
그 순간만은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그 감정이 사라지는 방식이었고,
나는 그 방식을 매일같이 되새기며
하루를 견디고 있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그날 무너졌던 나 자신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